"어, 한국 놈이 이기네!". 일본 고모할머니의 말씀이다. 일본 고모할머니는 나의 유일한 고모할머니셨는데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자수성가하셨다. 오래 일본에서 생활하신 탓에 우리 말 발음이 유창하지는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우리 집에 다녀가셨는데, 오랜 만의 귀국이었고 그 이후로 다시 오시지 못하셨으니 아마도 그때의 일은 고모할머니께 소중한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고모할머니와 함께 외출한 적은 없었고, 저녁이면 TV를 함께 보곤 했던 기억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때는 권투가 국민적 스포츠여서 TV앞에 앉아 있으면 언제나처럼 권투중계를 하였기에 코피 터지고 다운되는 장면을 실컷 볼 수 있었다. 일요일엔 '챔피언스카웃', 토요일엔 '토요권투', 수요일엔 '수요권투'가 황금시간대에 방영되었고, 매년 개최되는 신인왕전의 매표소에는 장사진이 늘어섰으며 아침이면 요란한 색깔의 운동복을 입고 분주히 주먹을 날리며 달리는 권투 지망생과 곧잘 마주치곤 했다. 유제두⋅홍수환⋅김태식은 우리들의 영웅이었고 세계챔피언전은 물론 동양챔피언전이라도 열리면 다방은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심지어 학교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지낸 무하마드 알리가 은퇴 후에 방한하자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청 앞 광장까지 오픈카타고 카퍼레이드하는 장면을 대낮부터 생중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권투경기에서 우리 선수가 일본 선수에 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일본 선수들은 대개 1라운드부터 난타 당했고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위기에 몰리다 결국 우리 선수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우리는 환호성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고모할머니와 권투 중계를 보는데 "어, 한국 놈이 이기네"하신 것이다. 기가 세신데다 일본에서 고생을 많이 하셔서인지 말씀이 보통이 아니셨다. "우리나라 선수가 당연히 이기죠"하니 "아니야, 일본에서는 일본 놈들이 다 이겨!"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의 의미를 한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삼류 일본 복서를 데려와 난타하여 KO시키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삼류 복서를 데려다 비슷한 '짓'을 했다. 두 나라는 서로 값싸고 만만한 자를 데려다 두들겨 패는 것으로 감정의 배설을 하고 있었다. 서로 간에 정보의 교류가 되지 않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여러 사람을 기만하였던 것인데 일본에서 오래 생활하신 고모할머니의 눈에는 정확히 보인 것이다.
필자의 청소년기는 '우리가 최고'또는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식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의 최면에 빠지기 쉬운 토양이었다. 당시 우리는 행복이나 이상을 추구하는 개인이 아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으로 교육되었다. 1960, 70년대의 '국적 있는 교육',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구호아래 이루어진 국사교육 강화는 민족적 성향을 심화시키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세계사는 물론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의 종합적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미흡한 점이 많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경향은 많이 시정되었지만 주변 국가를 새로운 세기를 함께 맞이한 역사의 동반자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종종 들곤 한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 갑옷을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못하겠는가마는 화살 만드는 사람은 행여 사람을 상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행여 사람을 상할까 두려워하나니, 무당과 관 만드는 목수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기술을 (선택함에) 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맹자는'업'(業)의 선택이야말로 인간이 신중히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교육으로 대체하여 보면 어떨까 싶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육받았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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