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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아닌 시인으로도… 관조와 수긍의 원숙한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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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아닌 시인으로도… 관조와 수긍의 원숙한 경지

입력
2013.04.0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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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승원(74)씨가 새 시집 (서정시학 발행)을 펴냈다. 아니, 이 문장은 모순이다. 그가 문단에 나와 보낸 45년의 세월은 소설가로서의 이력이 두드러지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시업으로도 22년차에 들어서는 관록의 시인. 그러므로 첫 문장은 '시인 한승원'으로 고쳐 써야 옳다.

이번 시집은 1991년 첫 시집 로 시인의 칭호를 얻게 된 그가 2008년 이후 쓴 시들을 묶은 다섯 번째 시집이다. 작은 사물과 그 단서에서도 인생과 우주의 질서를 간파해내는 노련한 시선에, 미당의 시편들을 떠올리게 하는 노시인의 농익은 관능까지.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76편의 시들은 오랜만에 서정시를 읽는 고전적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시방은 춘삼월 꽃 시절이므로, 꽃 노래부터 읊어보자. '진달래꽃이 산천에 불타오르기 시작하면 꽃 몸살을 앓는' 시인은 아예 4부로 구성된 시집의 2부를 온갖 꽃들로만 가득 채웠다. 연꽃, 제라늄, 수선화, 살구꽃, 난꽃, 안개꽃…,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그 중 절창은 '벚꽃'. 못 자리 논의 물갈이를 하느라 팔소매와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인 열아홉 살 청년과 삼단 같은 검은 머리채 끝에 붉은 갑사댕기를 찰랑대며 물동이 이고 걸어가는 열아홉 소냐. 그 둘이 마주치는 한 찰나를 그린 시 '벚꽃'은 신화적이라 해도 좋을 봄밤의 성적 긴장감으로 충일하다.

'열아홉 살 소냐의 여치 더듬이처럼 긴 속눈썹 앞으로/ 흰 눈송이 같은 꽃잎들이 흩날린 그날 밤/ 뒷산 기슭의 보리밭에서 서로를 얼싸안은 그들의 머리 위로/ 별똥들이 전설처럼 쏟아졌고, 보리 이파리들 으깨어지는 풋내 진동했는데//바야흐로 만개한 벚꽃이 숨을 막히게 한다/ 벌들도 숨이 막힌 듯 잉잉거린다.'

전남 장흥 바닷가에 살고 있는 시인이 '이즈음 꿈은 늘 이승과 저승이 섞이곤 한다'고 반복해 언술할 때, '어리석게도 새 세상에서 얼른 어른이 되어 살아가려고 덤비었다'고 지나간 '꽃 시절'을 '안개 속의 음화 한 폭'으로 그리워할 때, 이것은 아쉬움과 회한의 술회가 분명하지만, 그는 이내 딛고 일어선다. 그것은 시인 특유의 불교적 상상력이라 해도 좋고, 관조와 수긍의 원숙한 경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은 이제/ 어디론가 떠나갈/ 유서를 쓴다,/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지금의 순간들을 열심히 살아라/ 언제 어느 때든지 새 문장은 한 개의 마침표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 다녀가는 것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서시' 중)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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