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소설을 펴 들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날 즈음, 옆에 앉은 여자도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흘낏 그쪽의 책을 훔쳐보았다. 귀퉁이에 적힌 소제목이 낯익었다. 다시 내 책으로 돌아왔다. 같은 판형. 같은 조판. 펼쳐진 페이지의 가장자리로 드러난 같은 색깔의 하드커버. 여자와 나는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담. 요즘 누가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가 말이다. 나도 보통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곤 한다. 오늘은 갈 길이 멀어 소설을 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 그 많은 책들 중에서도 같은 책이라니.
책을 덮고 가방에 넣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보기로 했다. 머쓱했지만 한편으론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 사람은 절반쯤, 나는 삼분의 일쯤 읽은 상태. 나는 옆 사람이 지나간 세계를, 다른 느낌으로 이제 막 접어들고 있다. 나란히 앉은 채로 옆 사람은 앞에, 나는 뒤에 있는 셈이다. 선율이 선율을 뒤이어 따라가는 돌림곡처럼. 이런 상상도 해 본다. 벤치에 일곱 명이 주르륵 앉아 같은 책을 무릎 위에 놓고 제각각 다른 페이지를 읽고 있는 풍경. 마음의 악기들이 연주하는 독서의 푸가일 것만 같다.
옆 사람이 먼저 책을 덮었다.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는 모양이다.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다가 우리는 잠깐 눈이 마주쳤다. 멋쩍은 웃음이 스쳤다. 따로 또 같이, 우리가 책을 '연주'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던가 보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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