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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당대 진보적 사상과 맞짱 "광기는 이성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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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당대 진보적 사상과 맞짱 "광기는 이성에서 나온다"

입력
2013.03.2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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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턴의 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진보 동네'의 파행과 지리멸렬한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어떤 당에서 벌어진 풍경은, 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역설적인 진리를 새삼 상기시켰다. 당내 부정경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그 풍경은 심하게 말하면, 갈 데까지 간 이판사판의 진흙탕에 다름없었다. 그 막장의 드라마가 던진 성찰이라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진보파가 외려 퇴행의 굴레에서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를 보다 발전시키리라던 진보적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변화를 막는 족쇄가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왜 이런 역설이 나온 것일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데 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 뜬금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G.K. 체스터턴이 1908년에 집필한 은 제목 그대로 가톨릭 정통신앙을 옹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미국 기독교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가 20세기 최고 기독교 명저 100권 중 6위에 올릴 정도로 기독교계에선 명저로 꼽힌다.

외견상 '진보적인 정치'를 논구하는 책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책에는 원죄니 삼위일체 등 가톨릭 교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책의 주요 내용은 오히려 당대 지성계를 휩쓸던 현대의 '진보적' 사상에 대한 논의다. 이를 테면 유물론, 진화론, 회의주의, 니체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들과 씨름하면서, 저자는 그 사상들이 궁극에서 처하게 되는 역설적 문제를 드러내면서 현대인들이 상실한 그 무엇을 찾는다.

저자가 돌아가는 곳은 가톨릭 신앙이지만, 이런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가치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책의 보석 같은 매력은 바로 저자가 논쟁적 싸움을 걸고 있는 그 당대 사상에 대한 간결하면서 번뜩이는 통찰, 유머 넘치는 풍자와 허를 찌르는 통렬한 비판 등이다.

저자의 역설적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간단한 사례 하나. 매일 해가 떠오르는, 자연의 단순한 반복현상에 대해 과학적 사고로 무장된 현대인은 대개 권태를 느끼지만, 저자는 도리어 "해가 규칙적으로 떠오른 것은 그 일이 결코 지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일과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용솟음 덕분에 영위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어린이의 반복적인 놀이에 빗대는데, "어린이들은 생명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리고 열정적이고 스스럼없는 기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변함없이 되풀이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대결하는 사상들은 이성과 과학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세상을 더 좋게 진보시킬 수 있다는, 계몽사상의 후예들이다. 저자는 그러나 책 서두에부터 미치광이의 사례를 끌고 오면서 광기가 오히려 이성에서 나왔음을 역설한다. "시인들은 미치지 않는데 비해 장기꾼들은 미친다. 수학자들이 미치고 돈을 계산하는 출납원들이 미친다. (중략) 정신이상의 위험은 상상 속에 있지 않고 논리 속에 있다." 예컨대 피해망상증 환자는 무의미한 행동에도 논리적 인과 관계를 찾는데, 이는 광기가 이성을 잃은 게 아니라 협소한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보니 빠지게 되는 수렁이라는 얘기다. "미친 사람은 자기 이성만 빼놓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성에 대한 극단적 믿음이 광기로 치닫을 수 있다는 체스터턴의 경고는 섬뜩한 예언처럼 역사 속에서 실현됐다. 과학적 우생학이 인종주의를 부추겼고, 진화론은 적자생존의 이름으로 사회적 갈등과 지배를 정당화했고, 유토피아를 내세웠던 사회주의는 지독한 독재와 전체주의로 귀결됐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풍미했던 '진보적' 사상들이 1, 2차 세계 대전이란 전대미문의 파국을 낳는 데 일조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책은 또 민주주의와 진보 관념에 대한 여러 통찰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기존의 통념을 뒤집어 역설적 진리를 들춰내는, 그의 재치 있는 논증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가 왜 '역설의 대가'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저자의 논증은 결국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교인들에겐 기독교 진리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동시에 그의 문제 제기를 통해 진보적 사상들의 문제점도 점검해볼 수 있다. 이를 고민하는 이에겐 상투적인 관념의 밑바닥을 손질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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