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비수를 꽂는다. 그 비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맞는 것보다 몇 곱절 더 아프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스스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날 만큼 말이다. 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답답한 현실 때문에 한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그리고 한 여성을 통해 본 가족사는 70년대 이농현상 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과 90년대 도시 재개발과 같은 한국 현대사를 꿰뚫는다.
아홉번째로 태어나 구순이라는 이름을 받은 주인공은 세상을 향한 원망과 적개심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순진한 부모는 서울로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주위 사람의 말만 듣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외삼촌에게 사기를 당해 가게와 집 얻을 돈을 날린 채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종일 밖에서 노점상을 하며 단속에 쫓기는 부모님을 보는 것은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는 것처럼 힘든 일이지만 어린 구순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다 검은 얼굴에 꼬질꼬질해 흠 될게 없던 시골 생활과는 달리 도시내기 아이들과 경쟁하며 겪는 문화적 충격은 어찌어찌 극복한다 해도, 집안 사정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며 원망에 찬 언니 오빠들을 보며 가난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일찌감치 깨달을 따름이다. 게다가 엄마를 대신해 도시락을 싸주며 알뜰살뜰 챙겨주던 큰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멀어 고생하다 세상을 뜨자 구순은 프랑스로 미련없이 떠난다.
책은 프랑스에서 만화가로 자리잡은 구순을 찾아온 엄마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과거를 떠올리는 구성으로 한 편의 인생을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는다. 에두르지 않고 구구절절 풀어놓은 그 인생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다. 그 시절 누구와 비교해 유달리 불행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편의 지독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항상 눈을 치켜 뜨고 있는 주인공의 캐릭터. "밥 묵었냐"고 묻는 엄마를 향해서만 경계를 푸는 그 눈은 얼마나 팍팍하고 암울했는지, 식구들이란 늪에서 도망쳐 자기 자신을 찾겠다며 파리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심정을 대변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온기 넘치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엔딩 역시 푸근하고 넉넉했던, 그 잠깐의 행복했던 시절의 한 토막이다. 주인공이 소리를 곧잘 하던 죽은 아버지의 노랫소리를 회상하는 장면은 팍팍한 삶 속에서도 끝내 놓을 수 없었던 게 가족이었다는 걸 짐작케 한다. 서울로 올라와 변변찮은 벌이 때문에 담배만 뻑뻑 피워대던 아버지가 아닌 시골 마을의 임시의사이자 최고 소리꾼이었던 아버지의 '사랑가'는 긴 여운을 남긴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간결하면서도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수묵담채화풍의 그림은 진한 한국적 정서를 담뿍 담고 있다.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은 감정이 통하는 걸까. 지난해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는데, 그 해 몽펠리에 만화 페스티벌서 '문화계 저널리스트들이 뽑은 언론상'을 받는 등 관심을 끌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즈음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작가는 "떠나 보고서야 내 뿌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책에 썼다. 한국에 돌아와 그가 맨 먼저 한 일 역시 아버지가 잘 하던 판소리를 배우는 일이었다고 한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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