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대표 서민 공약인 국민행복기금이 29일 공식 출범한다. 수혜자가 당초 공약의 10분의 1 수준인 32만 여명으로 줄었지만, 금융당국은 다중채무자의 장기연체 채무를 줄여줌으로써 패자부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빚을 갚아 온 채무자들과의 형평성, 모호한 지원대상자 선정 기준, 남은 빚 상환의 불투명성 등 딜레마는 여전하다.
"열심히 빚 갚은 나는 뭐냐"
음식점을 운영하는 강모(37)씨는 2008년까지 다중채무자였다. 잇단 사업 실패로 빚이 8,000여 만원에 달했다. 개인파산 신청을 고민하다 자살까지 생각했었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사회취약계층 창업자금을 대출 받아 음식점을 열었다. 그는 "죽을 각오로 열심히 일해 5년간 성실히 빚을 갚았고 이제 1년만 더 갚으면 청산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빚을 탕감해주는 국민행복기금 소식을 접할 때마다 기분이 착잡하다고 했다. "저라고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힘든 건 똑같은데 열심히 빚 갚은 사람으로서 억울하죠."
성실 상환자와의 형평성 논란은 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국민행복기금을 언급하면서부터 예견됐던 딜레마이다. 정부가 저소득층 장기 연체자의 빚을 감면해줄 경우 똑같이 어렵지만 열심히 빚을 갚아 온 사람들이 '나만 바보인가'라는 불만을 갖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 금융계 인사는 "국민행복기금이 정치적 산물인데, 다음 대선에서도 유권자들이 채무 탕감을 요구할 경우 어느 후보자가 거부할 수 있겠냐"라고 반문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행복기금 운용사인 자산관리공사(캠코)에는 요즘 지원 기준을 따지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빚이 1억원을 넘으면 왜 지원이 안되느냐", "연체기간이 5개월인데 왜 탕감해주지 않느냐"는 등의 하소연이 많다. 정부의 고민은 이해가 간다. 도적적 해이를 막기 위해 기준 설정은 불가피하며, 지금보다 기준을 완화해도 불만은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같은 액수의 대출이라도 누구는 탕감되고 누구는 탕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총 대출액 1억2,000만원인 A, B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A는 행복기금과 채무재조정 협약을 맺은 금융권에서 전액 대출받았고, B는 협약 맺은 금융권에서 1억원, 협약 맺지 않은 무등록 대부업체에서 2,000만원을 빌렸다. 이 경우 A는 전혀 채무감면 혜택을 받지 못하는 반면, B는 1억원 대출만 확인돼 최대 5,000만원까지 탕감 받을 수 있다.
빚 탕감 이후가 더 문제다
채무감면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남은 빚을 성실히 상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부는 저소득층 채무자들의 취업 및 창업 지원을 병행한다는 방침이지만,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저소득층 가구의 금융대출 잔액은 평균 7,228만원으로 연간 가처분소득 873만원의 827.4%에 달한다. 빚을 갚는데 무려 8년 이상 걸리는 셈. 소득이 있어도 이런데 6개월 이상 연체자 가운데는 소득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국 빚을 절반 탕감해 줘도 나머지 빚을 갚지 못해 또 다시 연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3개월 이상 연체자에게 채무감면과 함께 상환기간을 10년까지 연장해주는 신용회복위원회 개인워크아웃의 경우 신용회복 성공률은 21%에 불과하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채무감면은 필히 소득향상 대책과 병행돼야 한다"며 "공공근로사업을 확대하고 최저임금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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