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존경해마지 않는 시인 L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선생님의 책을 꼭 만들고 싶다고 말했던 게 지난주의 일이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내가 원체 게을러서 책이 될 만한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면서 고사하셨다. L선생님은 등단하신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만 내셨을 정도로 엄혹한 염결성을 가진 분이다. 평소 선생님의 시편을 통해 가장으로서의 성실한 책임감과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노동에 대한 소박한 옹호 등을 읽어냈던 나는 선생님의 정결한 일상을 담은 산문집을 꼭 내고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선생님, 오늘부터라도 하루하루 선생님이 보고 들으신 이야기,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보시는 게 어떨까요? 저희랑 계약을 하시면 서운하시지 않을 정도의 계약금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일기를 쓰는 건 좋은 일인데, 그걸 미리 계약을 해두고 하는 건 글을 내다파는 것 같아서 싫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이 글을 쓰게 되어서 책으로 묶을 만하다는 판단이 들면 당신 쪽에서 먼저 출판사에 전화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더는 선생님을 조를 수 없었다. 어떤 시인은 기백만 원의 계약금을 노리고 여기저기 이중삼중으로 기약하지 못할 계약을 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L선생님과 통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여기에 이런 시인도 있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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