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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 소리 정겨운 30km 완행 추억역 지나자 낭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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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 소리 정겨운 30km 완행 추억역 지나자 낭만역

입력
2013.03.2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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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증기기관차가 퇴역한 게 1967년. 그래서 '칙칙폭폭'은 의성어가 아니라 사실 관념어다. 실제론 이런 소리가 난다, 요즘 기차는. '쉐~에에엑'. 그럼에도 여전히 '칙'과 '폭'으로 분절되는 템포로 기차여행을 표현하는 건, 시속 300㎞의 강파른 연속음엔 여행자의 감상이 끼어들 틈이 비좁은 까닭일 것이다. 기찻길에서 우린 속도를 얻었고 낭만을 대가로 지불했다.

다음달 12일 다시 칙과 폭의 템포로 달리는 기차가 부활한다. 시운행 중인 기차를 미리 타봤다. 시속 30㎞. 과연 느려터졌다. 에어컨은 안 보이고 천장에 선풍기 달려 있다. 왕겨탄 태워 난방 하느라 객차 안 공기는 매캐했다. 근데 이 기차, 미어터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속도에 웃돈을 얹어주고라도 다시 바꾸고픈 낭만이, 느긋한 기관차에 달랑 세 량 달린 열차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코레일이 다음달 운행을 시작하는 관광전용 열차의 이름은 오트레인(O-train)과 브이트레인(V-train)이다. 각각 중부내륙 순환열차,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브랜드다. 빰빠라~하고 등장하는 이단 합체 로봇의 이름 같아서, 성근 영어를 조합해 놨는데도 밉지가 않다. 없던 철로를 새로 깐 것은 아니다. 순환열차는 제천-풍기 구간 중앙선, 봉화-철암 구간 영동선, 태백-제천 구간 태백선을 둥근 고리 형태로 연결해 하루 네 차례 돈다.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4시간 50분. 협곡열차는 순환열차의 노선 가운데 분천-철암 사이 영동선 구간을 하루 세 차례 왕복한다. 편도 소요 시간은 1시간 10분.

순환열차든 협곡열차든 노선 자체는 알려져 있던 것이다. 환상선 눈꽃열차라는 이름으로 겨울엔 꽤 관광객이 몰리는 노선이기도 하다. 달라진 것은 열차의 모습과 운행 스케줄, 그리고 정차하는 역의 순서 같은 것이다. 정차하는 역마다 트레킹 코스 등 주변 관광지를 연결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말하자면 하드웨어는 놔두고 소프트웨어만 업그레이드했다. 그것만 가지고 뭐가 달라졌을까 싶지만, 다르다. 낡은 것은 뭐든 무너뜨리고 새로 짓고, 그러느라 멀쩡한 산하까지 후비고 파고, 그래서 종국엔 본래 매력을 망쳐버려야 관광 인프라가 개발되는 줄 아는 나라에서 코레일이 모범 답안을 내놓은 셈.

각설하고, 협곡열차를 타러 가보자.

"열 명이라든가, 열 한 명이라든가… 여튼 그렇게 죽었다 카대. 여어(여기)도 기차가 설 때까지."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원곡마을에서 밭 갈던 할아버지는 이렇게 운을 뗐다. 영동선 양원역이 생기게 된 내력이다. 우선 외관부터 좀 보자. 참 작다. 멀리서 보면 조금 큰 개집 같다. 시멘트 단칸 건물에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어놨다. '양원역대합실'이라고 쓴 여섯자는 누군가의 손글씨. 내부엔 벤치 두 개와 열차 시각표, 모서리 깨진 시계 하나가 전부다. 열다섯 발자국쯤 떨어져 있는 화장실은 훨씬 더 작다. 문도 없다. 높이가 어깨까지도 안 돼 들어가 일을 볼짝시면 엉거주춤 허리를 숙인 채 후진해야 한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작은 역일텐데, 이 역사(驛舍)가 대한민국 제1호 민자역사다.

할아버지의 얘기는 이러했다. 영암선(영주~철암)이 개통된 건 1955년. 그러나 원곡마을엔 기차가 서지 않았다. 타려면 이십리를 걸어서 이웃 승부나 분천마을로 가야 했다. 장이라도 보고 오는 날엔 짐만 창 밖으로 던져 두고 몸은 나중에 역에서 내려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기차에 부딪쳐 죽고, 다리에서 떨어져 죽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사람만 열명이 넘었다고. 수십년 민원 끝에 1988년, 마침내 원곡마을에도 기차가 정차했다. 역사도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삽 들고 지게 지고 시멘트값 추렴했다. 그렇게 만든 게 지금의 양원역사다.

양원역에서 시운행하는 협곡열차를 기다렸다. 동대구와 강릉 오가는 무궁화호만 하루 네 번 정차하는, 타고 내리는 이가 거의 없는 역은 고요했다. 기찻길 바로 옆으로 낙동강 상류가 나란히 흘렀다. 숲과 들에 조금씩 봄빛이 들고 있었다. 아직은 산보다 강의 녹색이 싱싱했다. 볕만 벌써 따가웠다. 적막했으나 쓸쓸하지 않았다. 이젠 오래된 책 속에나 있는 산골 간이역, 딱 그 다섯 글자에 합당한 풍경. 협곡열차의 운행이 시작되면 이곳도 붐빌 것이다. 요란한 장삿속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말길.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물줄기 따라서 크게 꺾이는 철길 위로 협곡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협곡열차는, 코레일은 '복고'를 콘셉트로 설명하는데, 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감상을 갖게 될 듯하다. 기관차는 흰 바탕에 검정 줄무늬가 있는 백호 색깔로 칠했다. 객차는 고급스러운 자주색, 안으로 들어가면 어린이집 내부 같은 맑은 계열의 색이다. 에어컨 대신 목탄난로와 선풍기, 활짝 열리는 넓은 창으로 냉난방을 해결한다. 쾌적함을 바란다면 불편할 수 있겠으나, 옛 추억과 환경을 생각하는 여행자에겐 반가운 것들이다. 백열전구와 복고?승무원 복장도 재미있다. 다만 옛 비둘기호를 연상케 한다는 좌석은, 진짜 비둘기호 좌석의 포근했던 화섬솜 느낌을 기억하는 내겐 너무 미끈했다.

기차는 천천히 서행했다. 양원역부터 승부역까지는 태반이 터널과 교량이다. 바꿔 말하면 좌우로 펼쳐지는 풍광이 모두 굽이치는 협곡이다. 퍼스트클래스는 세 량의 객차 가운데 맨 끝 칸의 맨 끝 자리. 좌우뿐 아니라 열차의 후면도 모두 유리로 돼 있어 백두대간의 속살이 270도의 아이맥스 파노라마로, 장쾌하게 줌아웃(zoom out)된다. 이 자연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본전은 넉넉히 하고 남는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이라던 승부역은 1998년 역사가 신축됐다. 하늘도 꽃밭도 함께 확장 공사를 했는지, 이젠 휑한 개활지 느낌이다. 이곳에 맨손으로 영암선을 뚫은 내력을 담은 기념비가 있다.

이어서 석포역 거쳐 철암역까지는 석탄산업 시대의 기억을 더듬는 현대사 여행이다. 몰려든 탄부들의 이야기, 쫓겨난 화전민들의 이야기, 폐광 후 저절로 복원돼가는 생태계의 이야기가 기찻길에 소복 쌓여있다. 그런데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나는 봉화와 달리, 태백으로 넘어 오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뻥뻥 넓게 뚫어놓은 길 위로 자동차들이 세 배쯤 되는 속도로 협곡열차를 앞질렀다. 산골 폐광촌에도 이렇게까지 길을 뚫어놔야 할 만큼 우리는 바쁠 수밖에 없는 걸까. 디젤기관의 협곡열차도 칙칙폭폭 소리를 내진 못했다. 덜커덩, 덜커덩. 세 박자로 여유 있게 레일을 밟는 소리가 이렇게 들렸다.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

여행수첩

●4월 12일 개통하는 오트레인(중부내륙 순환열차)은 오전 7시 45분 서울역을 출발해, 제천 영주 태백 영월 등을 잇는 순환 구간을 하루 네 번 돈다. 1, 2, 3, 5, 7일권 형태로 승차권을 판다. 정해진 기간 중 원하는 만큼 내리고 탈 수 있다. 1일권 5만4,700원, 7일권 12만3,000원. ●같은 날 개통하는 브이트레인(백두대간 협곡열차)은 분천-철암 구간 27.7㎞을 하루 세 차례 왕복한다. 한 번 표를 사면 어느 역에서든 내리고 탈 수 있다. 승부역과 양원역, 비동 임시승강장 등에 낙동강 협곡을 끼고 걷는 트레킹코스가 개발 중이다. 편도 8,400원. ●코레일은 정차역과 부근 관광지를 잇는 이동 수단으로 '카셰어링'을 운영한다. 영월, 철암, 분천, 단양역에 4대씩 16대의 차량을 배치해 저렴한 값에 대여해준다. 차량은 원하는 역에 반납할 수 있다. 향후 차량과 배차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1544-7788

봉화ㆍ태백=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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