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선임기자 jaylee@hk.co.kr
김재철 MBC 사장이 드디어 해임됐다. 그가 ‘낙하산 논란’ 속에 사장 자리를 꿰찬 것이 2010년 2월 26일이니 꼭 3년 1개월 만인데, 어째 5년은 더 된 듯한 느낌이다. 그가 공영방송 MBC에, 나아가 한국언론사에 드리운 그림자가 그만큼 짙고 길었던 탓이다. 26일 오전 MBC의 대주주이자 관리감독기관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에서 그의 해임안이 가결되자 MBC 자회사인 iMBC 주가가 한때 8% 가까이 올랐다는 웃지 못할 뉴스도 전해졌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김씨의 해임은 만신창이가 돼 버린 MBC를 정상화하기 위한 첫 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내디딘 그 걸음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김재철 체제’에서 승승장구했던 이들이 후임 사장 후보로 거론되는가 하면, 입만 열면 종북(從北) 타령인 변변찮은 인물까지 ‘종북노조’를 잡기 위해 사장 공모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것은 그런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MBC 정상화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방문진이 과연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다. 이날 김씨의 해임안은 찬성 5표, 반대 4표로 가까스로 가결됐다. 해임안 상정의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감독기관인 방문진과 사전협의도 없이 지역 계열사와 자회사 임원 내정자를 발표한 것이다. 김씨는 이날 이사회에 출석해 “이사장만 만나서 얘기하고, 이사장이 양해하고 동의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한마디로 이사장을 비롯한 여당 추천 이사들을 자신이 무슨 일을 벌여도 다 받아 줄 ‘거수기’로 여겼다는 말이다.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여당 추천 이사 6명 중 4명은 다시 그의 손을 들어줬다.
사실 방문진의 비호가 없었다면 김씨가 민주화 이후 한국언론사에서 최악으로 기록될 갖가지 전횡을 일삼지 못했을 것이다. 방문진은 2011년 방송통신위원회가 진주ㆍ창원MBC 통폐합안을 보류한 데 반발해 김씨가 사임 의사를 밝혔을 때도 재신임을 의결하는 촌극을 벌였다. 2012월 1월부터 장장 170일간 이어진 MBC 노조의 파업 사태와 뒤이은 보복 인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고, 김씨의 법인카드 유용 등 각종 의혹에도 철저히 눈감았다. 야당 추천 이사들이 세 차례 김씨 해임안을 냈지만 번번이 ‘6 대 3’의 벽에 부딪쳐 부결됐다.
김씨 해임을 계기로 정치권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현재 여당 추천이 절대다수인 KBS와 방문진의 이사를 여야 동수 추천으로 구성하자거나 사장 선임과 같은 주요 사안의 경우 과반이 아니라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하게 하는 방안 등이 나와있다. 여야가 최근 국회 안에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을 논의할 방송공정성특위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만큼 여야 모두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어 바람직한 해법을 찾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놓는다 해도 권력을 쥔 쪽에서 언론, 특히 방송을 제 편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는 한 제도는 언제든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박근혜 정부의 행보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박 대통령은 정부조직 개편안이 여야 대립으로 표류하고 있던 지난 4일 대국민담화에서 “언론을 장악할 의지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시절 내내 공영방송의 공정성 훼손 사례가 줄을 이었는데도 마치 남의 나라 일처럼 얘기한 것이다. 더구나 방송사 인허가권 등을 쥔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후보자로 자신의 측근인 이경재 전 의원을 지명해 “언론을 장악할 의지가 없다”는 말까지 의심하게 했다. 진짜 그럴 의지가 없다면 전 정부에서 벌어졌던 공영방송 압살 사태에 대해 먼저 겸허히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또 “의지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는 의심을 살 어떤 행위도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최고권력자의 의도가 여전히 의심받는 상황에서는 ‘제2, 제3의 김재철’이 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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