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세월 형성된 단층이 작은 균열에 뒤틀리는 '정신적 지진'의 양태그리고 마주친 섬뜩한 상처 담백해진 문장으로 돌아봐"후일담 그만 써도 될 듯 평범한 일상·속악한 인물과 이제 시선을 포개고 파"
지금 이 소설가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은 담백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무겁고 싶지 않다는 것, 육중한 자아와 상처로 흐느적거리는 먹물들 대신 일상의 평범한, 그래서 때로는 속악한 인물들과 시선을 포개고 싶다는 것. 심지어는 읽는 이들이 밑줄 긋는 문장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과도한 밀도를 지닌 문장들이 나올까 봐 경계하며 새 소설들을 썼다고 하니, 이쯤 되면 소위 '후일담 소설'의 적통이라 할 만한 이 소설가의 새로운 비상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해도 좋을 것 같다.
지난해 장편소설 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권여선(49)씨가 2010~12년 쓴 중단편을 모은 네 번째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일곱 편의 소설 속에서 작가가 담백해진 시선으로 돌아본 것은,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기억과 망각이 불현듯 초래하는 '정신적 지진'의 양태. 진앙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지적할 수 없다. 다만 어느 한 순간 관계의 기반에 작은 균열이 생겼고, 인지하지 못한 그 균열은 긴 세월에 걸쳐 단층을 형성하고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지반을 뒤틀고 들어올린다. 인물들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기억이 증폭되고 폭발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하게 자기 기억을 관리하며 살고 있잖아요. 낭만화, 합리화하면서요." 관계 속에서 상처가 발생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각자의 안전장치가 상반된 방향으로 전류를 흘려보낼 때가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지난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의한 미화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아무도 몰랐던 괴물과 마주하는 일이 된다. 단편 '은반지'를 보자.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된 노년의 오 여사는 오갈 데 없는 동년배의 심 여사를 동무 삼아 자신의 빌라에 들인다. '비록 심 여사가 오 여사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지만 오 여사는 한 번도 심 여사에게 눈치를 주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5년 후 심 여사는 말도 없이 떠나버린다. 오 여사는 울화가 끓어 견딜 수가 없다. '심 여사의 태도는 죄를 알려주지 않고 징벌부터 내리는 못돼 먹은 신을 닮았다. 누구나 홀연히 떠남으로써 타인에게 신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종교광신에 빠져든 심 여사는 훗날 다시 만난 오 여사에게 말한다. 당신과 함께했던 삶은 '구렁텅이이자 개골창에 처박힌 삶'이었다고.
주지하다시피 망각은 기억의 한 형태다. 잊기로 한 기억이 망각이므로, 망각의 각질을 벗겨낸 자리엔 낯설도록 생생한 그때 그 순간의 기억이 있다. 대학 룸메이트였던 단짝친구 경은과의 엇갈린 한때를 그린 '진짜진짜 좋아해', 애인을 사고로 잃은 여인이 그의 어머니, 동생과 함께한 짧은 여행 이야기인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 빚과 친구를 피해 고시원에 숨어사는 미용사의 이야기를 다룬 '길모퉁이' 등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이 기억의 단절과 망각을 해체하고 섬뜩한 상처와 마주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로 후일담의 세계에 이별을 고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나 아닌 주변을 둘러볼 때도 앞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고 서 있다. "작년에 한국일보문학상이 제 소설세계에 빛나는 방점을 찍어줬어요. 한 시기가 일단락됐달까, 이제 후일담은 그만 써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 제 세계 경험에 얽매여왔다면, 이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겪고 보고 아파한 것을 써보고 싶어요. 쉰 살을 목전에 두고서야 드디어 세상을 보고 싶어진 거죠."
그의 소설을 대하는 담백한 태도는 단편 '팔도기획'에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하게 그려져 있다. 문학의 가장 속악한 형태일 자서전 대필 기획사에 문학에 대한 경건함으로 무장한 수녀풍의 윤 작가가 입사한다. 닭발집 사장의 환갑기념 자서전 대필에 문학성 외의 어떤 기준도 허여하지 않는 불굴의 윤 작가 때문에 닳고 닳은 처세의 달인들은 미칠 노릇. 놀리고 비웃고 헐뜯고 화내다가 급기야는 해고한다.
닭발집 사장을 빛나는 영웅서사의 주인공으로 등극시키는 과업을 마친 후, 회식의 기대로 부푼 팔도기획 직원들은 그러나 불의의 급습을 받는다. 신권지폐처럼 맨질맨질하게 생긴 홍 팀장이 윤 작가의 원고를 보다가 울컥한 것이다. 모두가 조롱하고 모욕한 윤 작가의 글엔 '홍 팀장 같은 인간의 깊숙한 어딘가를 건드려 눈가를 세차게 비비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누구라도 인간의 외로움을 절감케 하는 문학적 힘이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 소설이, 이 속악한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다짐으로 읽히는 건 어쩔 수 없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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