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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힐링은 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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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힐링은 답이 아니다

입력
2013.03.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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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2010년 나오자마자 20대 담론의 물줄기를 바꿨었다. 그전까지 20대 담론은 나 '개새끼론'처럼 일방적 시선으로 20대를 부정적으로 해부하거나 일방적으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는 담론의 향배를 '위로', '멘토링' 등으로 급격히 바꾸게 했다. 그만큼 시류에 맞았었다.

그러나 과연 위로나 멘토를 통해 젊은 독자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기성세대의 비난과 위로란 기실 동전의 양면 아니겠는가? 어쨌든 의 속편 격이라는 도 초대형 밀리언셀러가 되어 있다. 기실 매우 추상적이고 들으나마나 한 지루한 일반론이 가득한 책이다. 이미 이같은 '청춘팔이'와 '멘토를 사칭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성공담과 인생론을 펼쳐놓는 낯간지러운 서적'들에 대한 비판도 나와 있다. (, 시사인 260호) 그러나 힐링은 멈추지 않는 거대한 사회적 유행이다. 같은 책도 초대형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출판사들이 잘 생긴 젊은 스님을 찾아 헤맨다는 웃지 못할 농담도 들린다.

물론 동어반복적인 일반론과 개똥철학이 한 말씩 담긴 책들로부터도 누군가들은 지혜를 추출할 수 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인간은 막연한 조언과 인생론에도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투사하거나 대입할 수 있고, 그로부터 실제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효과는 위로나 멘토 덕분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듣거나 읽는 이 스스로의 내적 힘이다. 역사적으로도 행복론과 개똥철학은 언제나 약으로 처방되어 왔다. 인간의 권리 자체가 보장받지 못한 일제강점기나 1950~60년대에도, 고도성장과 반인권적 독재가 공존한 1970~80년대에도, 종교가나 성공한 자본가가 인생론이나 처세술 책으로 인기를 끌고 큰돈을 벌어왔다. 고통과 고난에 찬 삶을 살아가며, 행복과 위로를 갈구하는 개인들이 언제나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한경쟁과 불안정노동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말할 것도 없겠다. 오늘날의 '힐링'이란 낡은 처세·수양·행복론의 새로운 상표이다. 힐링은 완화된 자기계발론이며, 한편 더욱 개인주의화된 '경쟁력 강화'의 새로운 버전이다. 그러나 힐링은 사회적 고난과 관계의 문제를 '자기 탓'과 개인적 정신보건의 문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진부하다. 결정적으로 힐링에는 이유와 방향이 빠져 있다. 힐링 받아야 할 상처는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힐링 받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물음들 없이, 돈 잘 버는 부자나 잘 나가는 연예인도 위로의 대상이란다. 그런 힐링 스토리를 듣는 동안, 정작 진짜 연민과 공감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연은 잊혀진다. 진짜 연민의 눈물이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힐링 열풍은 그런 데 악용된다. 따라서 트렌드가 된 힐링은 진정한 치유와는 거리가 먼, 사회적 병증의 심화로 보인다. 그것은 2010년대 버전의 신파이다.

물론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당장 위로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이 절실하다. 우선 '힐링'을 공공화해야겠다. 정부가 할 힐링이란, 다름 아닌 복지 공약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치유에 대한 자세를 점검해야겠다. 무엇을 위한, 어디로 가기 위한 치유인지를 물어야겠고, 개인적이고 자족적인 위로가 아니라, 진짜 자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해야겠다.

오늘날 우리는 동화에 불과한 '7번방의 선물'이나 '광해'를 보다가도, 먼나라 옛 이야기인 '레미제라블'을 보다가도,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 정도로 젊은이들과 민중의 고난은 끝없이 깊다. 그러나 눈물로 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힐링과 멘토 열풍은 정치판의 지형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듯했고 우리는 나름 절실했는데 바뀐 건 하나도 없다. '강부자' '고소영' 당은 슬쩍 이름을 바꿔 재집권했다. 값싼 자기연민의 눈물은 닦고, 신파와 개똥철학은 버리고, 사회과학적 합리성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타인과 나를 함께 돌보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우리 사이를 다시 이어야겠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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