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껍데기 성과주의는 가라
(중) 스팩 대신 끼다
(하) 글로벌 기업들은 뭐가 다른가
박근혜정부가 표방하는 ‘창조 경제’의 핵심은 사람.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무장한 개인이 많아져야 국가의 성장동력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다는 논지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기업 인사시스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선발기준이 됐던 ‘스펙’은 점차 뒤로 밀리고, 이른바 ‘창조형 인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국내 굴지의 A 대기업. 이 회사의 직원 성과평가항목을 보면 당기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같은 재무지표의 가중치가 70%를 차지한다. 종업원 만족도, 교육투자 등 지속가능한 성장에 관한 비중은 5%에 불과하다. 이 회사 임원은 “아무리 중장기 노력이나 지속가능 성장이 중요하다고 말은 해도 결국 단기실적이 전체 평가를 좌우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기업에 성과주의가 도입된 지 15년. 외환위기 이후 미국에서 수입된 성과주의는 낡은 연공주의 인사가 가져온 폐해를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입사연한에 따라, 직급에 따라 똑같은 임금을 주다 성과에 따라 차등을 두니까 경쟁이 촉발됐고 생산성은 크게 올라갔다. 현재 연봉제를 실시하는 기업 비중이 73.9%에 이를 정도로 성과주의는 인사관리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기업에선 지금도 “인력은 많지만 인재는 없다”는 하소연이 심심찮게 들린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우선 보상체계만 서구식으로 바뀌었을 뿐, 승진ㆍ평가에는 여전히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적 관행이 개입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예컨대 국내 기업의 직급제도만 봐도 ‘대리 몇 년 후 과장’과 같은 연차 개념이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게 현실이다. 보상과 평가 체계가 제각각이다 보니 긴 안목이 요구되는 창의성과 성장잠재력 발굴은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 재계 관계자는 “단적으로 연구개발(R&D) 부문에서도 단기 실적주의와 과도한 내부경쟁으로 혁신제품보다 리스크가 낮은 개선제품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직된 인사관리의 폐해는 해외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실태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한국 기업의 해외법인에서 8년째 일하는 D씨는 핵심 인재로 인정받고 있으나 관리자 승진은 언감생심이다. 인사철마다 매번 한국에서 주재원을 파견하는 탓에 올라갈 자리가 없어서다. 그는 “본사에서는 계속 현지화를 독려하지만 구호에 그칠 뿐 몇 년 째 업무와 직위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본사 중심의 의사결정, 한국식 사고와 업무수행 강요 등 인력관리 방식의 후진성은 선진 기업으로 발돋움하는데 걸림돌로 꼽힌다. 조범상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인사ㆍ보상 시스템에 대한 본사와 해외법인간 연계성 부족은 현지 직원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라며 “글로벌 관점에서 해외 조직을 아우를 수 있는 인재경영 원칙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의 기형적 인사제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채용 시스템부터 뜯어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최근 들어 일부 기업에서 직무 중심의 인재를 선발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으나, 아직도 국내 대기업 다수는 서류심사와 면접 등 틀에 박힌 공채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불특정 다수가 대거 지원하는 상황에서 브랜드와 기업가치에 걸맞는 인재를 솎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자연스레 소위 ‘스펙’이 출중한 ‘범용형’ 인재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성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성과주의가 기업들이 불합리한 인사 관행에서 벗어나 재무 건전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면서 “다만 지금처럼 사람이 아닌 철저히 직무에 기반해 평가와 보상이 이뤄져야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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