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어린이를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 저린 일도 없다. 특히 암에 걸린 어린 딸을 둔 부모의 심정은 말로 다할 길이 없다. 항암제는 어린 난소를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불임이 될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딸을 살리기 위해 항암제를 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2009년 이런 소아암 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난소에서 난자줄기세포를 뽑아 저장해뒀다가 암을 치료한 뒤 이식하면 다시 건강한 난자가 만들어질 거라는 연구결과가 중국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항암제로 인한 영구불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세계 과학계와 의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3년여 만인 이달 초 이를 뒤집는 연구결과가 한국에서 나왔다.
줄기세포는 분명 난치병 치료의 희망이다. 하지만 희망이 진짜 현실이 될 때까지 과학은 신중해야 한다. 오리무중에 빠진 난자줄기세포의 존재 연구를 짚어본다.
"항암제 맞은 생쥐 출산" 中 발표 의문
중국 연구팀은 건강한 암컷 생쥐의 난소에서 난자줄기세포를 뽑아다가 난자를 제거하고 항암제를 주사한 다른 생쥐의 난소에 이식했다. 그랬더니 항암제를 맞은 생쥐의 난소에서 건강한 난자가 자라났고, 여기에 수컷 생쥐의 정자를 수정시켰더니 새끼까지 낳았다고 2009년 발표했다. 사람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면 소아암 환자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선 기존 과학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항암제는 원래 빠르게 분열, 증식하는 세포를 공격하도록 만들어진 약이다. 줄기세포도 암세포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분열하고 증식한다. 난자가 제거된 생쥐의 난소에서 난자가 새로 자랐다는 것은 외부에서 이식된 난자줄기세포가 항암제의 공격을 용케 피했다는 얘기가 된다. 빨리 분열하는 세포는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머리가 빠지는 등의 부작용이 생기는 항암제의 특성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다.
한-중 과학계, 묘한 긴장감
중국 연구팀은 또 생쥐에 난자줄기세포를 이식해 새끼가 태어나는데 25~50일이 걸렸다고 밝혔다. 생쥐의 임신기간이 약 20일이니까 가장 빨리 자란 난자줄기세포는 단 5일만에 성숙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보통 한 달 정도 걸리는 기간이 갑자기 5일로 단축된다는 건 생물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의문을 품은 건국대 동물생명공학과 김진회 교수와 경남과학기술대 간호학과 민계식 교수 공동연구팀은 생쥐 난소에 있는 원시난모세포(난자 발달 초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세포로 줄기세포의 일종일 가능성)를 채취한 다음, 난자를 제거하고 중국팀과 같은 항암제를 주사한 생쥐의 난소에 이식해봤다. 그 결과 원시난모세포는 완전히 소멸됐다. 김 교수는 "원시난모세포뿐 아니라 난자의 발달을 돕는 이른바 보모세포들도 항암제 때문에 모두 망가졌다"며 "난소 안이 새로운 난자의 발달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환경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팀의 연구결과로 세계 줄기세포 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발표 후 난자줄기세포가 불임치료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너도나도 난자줄기세포 연구에 뛰어들었는데, 중국 연구팀이 사용한 난자줄기세포가 '진짜' 난자줄기세포였는지 확신하기 어려워졌으니 말이다. 한국과 중국 과학계 간 묘한 긴장감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논쟁 가속화
사실 난자줄기세포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 건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종합병원 빈센트생식생물학연구소가 생쥐 난소에서 처음으로 난자줄기세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소는 지난해 사람에게도 난자줄기세포가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를 냈다. 성인 여성의 난소에서 채취한 난자줄기세포를 난모세포(분열을 멈추고 성장을 시작한, 난자가 되기 전 단계의 세포)로 배양한 다음 다시 난소 조직에 넣고 이를 쥐에 이식했더니 성숙한 난자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학계에선 이 연구소가 사용한 줄기세포가 진짜 난자줄기세포가 아니라 원시난모세포일 거라는 반박이 잇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난자줄기세포가 정말 존재한다면 여성이 폐경을 겪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2만~3만 개의 난자는 상당수가 사춘기 전에 소멸되고 일부만 성숙 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정해진 수의 난자를 임신과 생리 등으로 다 쓰고 나면 여성은 폐경이 된다. 난자줄기세포가 존재한다면 남성이 죽을 때까지 정자를 만드는 것처럼 여성 역시 평생 난자를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잇따른 반박으로 미국 연구팀의 난자줄기세포 발견 주장은 한동안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중국의 발표 이후 난자줄기세포의 존재 가능성에 다시 무게가 실렸다가, 이번 우리나라 연구결과로 다시 논쟁이 불붙기 시작하는 분위기다. 김 교수는 "세계 줄기세포 연구자들이 표면적으로는 난자줄기세포 존재 여부를 놓고 객관적 근거에 따른 논쟁을 벌이면서 물밑에서는 존재 가능성을 열어둔 채 서로 먼저 진짜 난자줄기세포를 확립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불임치료의 대안으로 의학적, 상업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정자줄기세포 존재는 확실
난자와 달리 정자줄기세포는 존재를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정자줄기세포 하나가 만들 수 있는 정자는 약 6,400마리나 된다. 이런 뛰어난 능력 덕에 고환은 하루에 2억~4억 마리의 정자를 생산한다. 실제로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팀은 2011년 건강한 원숭이의 고환에서 정자줄기세포를 채취한 다음 항암제를 주사한 원숭이의 고환에 이식해 정자를 생산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쓰인 정자줄기세포가 '진짜' 정자줄기세포라는데 대해 학계에선 이견이 없다. 고환은 항암제로 생식기능이 손상되더라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고환은 항암제의 영향을 난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정자와 정자줄기세포에게 혈액이 직접 닿지 않도록 철저한 보호막(혈액장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항암제가 혈액을 타고 난소로 흘러가면 난자는 곧바로 손상을 입지만, 고환으로 흘러가면 혈액장벽 덕분에 정자줄기세포에는 직접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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