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 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미래 신산업을 설계하는 과학자"라며 조충호(55) 고려대 교수를 추천했다.
1994년 여름이었다. 조충호 고려대 세종캠퍼스 컴퓨터정보학과 교수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방학 동안 같이 미국에 가서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오자는 것이었다. 조 교수가 얘기한 새로운 분야는 인터넷통신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편지 보내고 TV 보는 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인터넷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다.
사실 대학 교수가 방학 기간을 이용해 외국으로 나가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오는 경우는 흔하다. 그런데 조 교수가 제안한 공부는 여느 교수들처럼 외국 교수를 찾아가 공동연구를 하거나 교수들끼리 모여 심포지엄을 하는 게 아니었다. 미국 대학에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을 모아 단기간 기존 커리큘럼에서 접하기 어려운 새로운 학문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주는 프로그램(튜토리얼)이 있다. 조 교수는 보스턴에 있는 한 대학에 인터넷통신 튜토리얼이 개설된다면서 이걸 배워놓으면 앞으로 할 일이 무궁무진할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학자로서 호기심에 이끌려 조 교수를 따라 나섰다. 우리 둘 다 가족들은 한국에 둔 채 두 달 동안 보스턴에서 다시 학생으로 되돌아갔다. 새로운 공부는 흥미로웠지만, 현직 교수가 세대차가 확연한 어린 대학생들과 함께 좁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경험 덕에 우린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인터넷통신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눈뜰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조 교수의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조 교수를 남다르게 평가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인터넷통신 튜토리얼에 참가한 뒤 그는 자신의 원래 전공인 컴퓨터공학에 남들보다 앞서 인터넷통신을 접목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산업과 통신을 융합한 기술로 에너지 절감 건물을 만드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각 방이나 층마다 원격으로 온도를 조절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시스템을 갖춘 건물을 설계하는 것이다.
인터넷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덩달아 통신 전문가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통신기술을 컴퓨터나 휴대전화 이외의 다른 산업 분야에 활용하는 연구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조 교수는 바로 이런 분야의 중진 학자로 성장했다. 약 20년 전 함께 튜토리얼에 참가한 이후 난 여전히 원래 전공인 인공지능에 머물러 있는데, 조 교수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걸 남다른 분야를 개척한 것이다.
1980년대 프랑스 유학시절 당시 잠깐 스쳤던 인연부터 치면 조 교수와는 벌써 30년 가까이 알고 지내는 셈이다. 우리 인연 초기에 조 교수는 원자력발전소 고장 여부를 진단하는 시스템을 만들거나 제철소의 쇳물 운반용 철도 배차 간격을 조절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전형적인 컴퓨터공학자였다. 그랬던 그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우리 산업을 크게 변화시킨 무료전화 080 서비스와 3G(세대), 4G 이동통신기술의 상용화에 기여했고, 이어 에너지 절감 건물의 통신망을 구축하는 산업-정보통신 융합 전문가로 변신했다. 100% 스스로의 선택과 도전으로 말이다.
과학기술자가 전공 분야를 고집하고 있으면 새로운 분야는 결코 개척될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과학기술자가 자기 분야 밖으로 시야를 넓히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조 교수는 과학기술자의 이런 한계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학생으로 되돌아가길 자처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미래에 한국을 먹여 살릴 신산업은 이처럼 전공을 뛰어넘을 줄 아는 과학기술자가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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