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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마약 수사관, 세상의 그늘 시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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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마약 수사관, 세상의 그늘 시로 말하다

입력
2013.03.2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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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에 찔린 내 몸은 벌집이다. 몽롱해지면 먼지가 뽕가루인 양 밤새 주워 모은다. (중략) 꿈속에서도 누군가에게 쫓겨 다닌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시집 중 '크리스탈'이라는 제목의 시다. 시의 소재는 크리스탈처럼 반짝이고 먼지처럼 부질없는 뽕가루 즉 마약이다. 30년 경력의 현직 베테랑 형사인 고석종(58) 서울 영등포경찰서 마약수사팀장은 타락의 대명사 마약을 비롯해 살인 강간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둡고 잔인한 현장을 시에 담는다.

1982년부터 10년 넘게 강력계 형사로, 이후 20년 이상을 마약전문 수사관으로 근무한 고 팀장은 마약사범을 체포하거나 조사한 날 밤이면 어김없이 시를 썼다. 몇 년 전 에이즈 환자를 붙잡은 날도 그랬다. 고 팀장은 22일 "37세 남성이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라 필로폰에 손을 댔다'고 펑펑 울었다"며 "적발된 필로폰 양이 많아 구속을 시켜야 했지만 그에게 느낀 연민 때문에 시를 쓰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법에 따라 범죄를 쓸어내는 형사는, 그러는 동안 가슴 속에 쌓인 갈등과 감정을 시로 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고 팀장은 어린 시절 시인을 꿈꿨다. 하지만 전남 완도군 고금면 깨섬이란 작은 섬마을에서 23세 때 가장이 된 그에게 시는 '밥벌이'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계를 잇기 위해 선택한 경찰이 새로운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시를 사랑한 사람들'로 등단해 2010년 시집 을 발간하며 늦게나마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거친 사회를 온몸으로 훑은 덕이었다. 고 팀장은 "먹고 살기 위해, 나만 바라보는 가족을 위해 경찰이 됐지만 30년 형사생활이 없었다면 시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정과리씨는 시평을 통해 "현장을 꿰뚫을 때 형사와 시인이 합쳐진다. 고 형사는 최고의 형사가 되면 될수록 형사에서 시인으로 진화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원구식 월간 현대시 발행인은 "이 시집의 치명적 아름다움은 생의 밑바닥에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죽음과 대비돼 선명히 드러나는 산 자의 목소리에서 연유한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고 팀장은 애써 자신의 시를 낮췄다. "서정시를 좋아하는 이들은 내 시 속의 거친 시어들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난 30년 말단형사이자 삼류시인일 뿐이니까."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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