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 돈을 벌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워낙 집안이 가난한 탓이었다. 청년이 되어 서울대에 입학했다. 배가 고파 친구의 하숙방에 있던 참기름을 보고는 병째로 마셔버린 적도 있다. 무사할 리가 없다. 며칠 동안 설사를 하며 부대꼈다. 거처를 구하지 못한 밤이면 대학 강의실에 숨어들었다.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온 강의실을 매일 밤 수위는 전짓불(손전등)로 비추었다. 휘두르는 불빛에 들켜 쫓겨나지 않으려고 몸을 피했다. 전짓불은 참을 수 없는 공포였다. 소년을 따라다닌 허기와 가난의 체험은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소년에게 빛은 '한 줄기 빛'이라는 상투적 표현의 안도감이 아니라 지독한 공포의 원인이 되었다. 작가 이청준의 이야기다.
이청준은 전짓불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트라우마는 재해를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반응이다. 뇌에는 외부 자극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두 개의 정보처리 시스템이 있다. 편도체와 해마이다. 편도체는 반사적이고 즉각적인 신체 반응을 유발한다. 해마는 외부 자극을 과거의 유사 상황과 비교하여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대응책을 시행한다. 두 시스템은 외부로부터 위협적인 자극이 들어올 때마다 상호 보완하면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뇌의 정보처리 시스템은 커다란 혼란을 겪는다. 자극에 대한 적절한 대처는 없어지고 불안과 공포, 무력감, 불안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뇌는 치유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트라우마는 억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면적으로 처리되지 않은 채 고정되어 있다. 사실에 대한 인식과 직면은 트라우마 해소에 중요하다. 트라우마 해소는 트라우마 사건의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의 사건을 삶의 전체 맥락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청준은 전짓불의 트라우마를 글로 썼다. 그 스스로도 "나의 문학 작업은 자기 구제의 한 몸짓으로서 출발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짓불 앞에서의 두려움과 공포를 밖으로 끌어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도 글로 써서 보면 담대해진다. 종이 위에 기록된 사건일 뿐이다. 견딜 만해지면 더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글쓰기를 되풀이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기를 갱신하는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질'의 출구는 불행한 가난의 체험을 승화시키려는 글쓰기 치유인 것이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느끼는 공포, 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진술 공포, 에서는 인간의 폭력적인 잔인성에 대한 공포를 형상화했다. 그의 글쓰기 목표는 공포의 제거와 참다운 자신의 모습 당당하게 드러내기였다.
간호사의 시각에서 볼 때, 예견하지 못했던 일을 겪으면서 보이는 다양한 행동들은 질병이 아니라 어려움에 대한 인간의 저항의 일부이다. 인간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갖고 있다. 다만 극심한 공포와 정서적 압력이 내적인 힘을 발휘하는 역량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자기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노력하는 동안 스스로 역량은 살아나고 강화된다. 용기를 내어 보자. 소설가 이청준처럼.
황효숙 가천대 외래교수 , 간호사ㆍ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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