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센터' 서장훈(39)이 은퇴를 선언하고 농구 코트를 떠났다. 그의 큰 키(207㎝) 만큼이나 그의 빈 자리가 커 보인다. 90년대 초반 연세대에 입학한 서장훈의 등장은 당시 한기범(205㎝)과 함께 고공 농구를 선보이며 본격적인 거인 시대를 열었다.
중국 고사를 보면 8척 장신 또는 9척 장신 등의 묘사가 나오지만 현대를 사는 일반인들에게는 2m를 넘는 거한을 보기가 쉽지는 않다. 기자가 처음 거인을 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당시 열쇠가 부착된 미닫이 문이 달린 흑백TV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류기성씨가 가끔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키가 225㎝였으니 현재 국내 최장신인 하승진(221㎝)보다 반 뼘은 컸다.
류기성씨는 1971년부터 27년간 대구에 있는 달성공원을 지켜 '거인 수문장' '달성공원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며 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던 추억 속의 인물이다. 달성공원을 찾는 외지인들은 꼭 류씨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할 만큼 그는 달성공원의 상징이었다.
아무래도 키가 크면 유리한 스포츠 분야에서 거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북한의 최장신 농구 선수였던 리명훈(235㎝)도 있고, 중국의 농구영웅 야오밍(229㎝)도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씨름 쪽에 거인 선수들이 많았다.
우선 생각나는 사람은 이봉걸(205㎝) 선수다. 큰 키를 이용한 밀어치기로 천하장사까지 오르기도 했던 이봉걸은 기술 씨름의 달인 이만기 현 인제대 교수에게 모래판에 내동댕이쳐질 때마다 멋쩍은 표정을 짓곤 했다. 뒤를 이어 김영현(217㎝)이 있었고, 모래판을 거쳐 격투기로 전환한 최홍만(218㎝)도 한 시절 씨름계를 풍미했다. 키가 크다 보니 거인 증후군을 겪는 선수도 있다. 대표적인 선수가 여자 농구의 김영희(202㎝)로, 그는 아직도 투병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농구 쪽에서는 하승진의 아버지 하동기(205㎝)씨를 비롯해 2m를 넘는 거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여자농구 최장신 하은주(202㎝)도 하동기씨의 딸이다. 그렇지만 큰 키와 기량은 비례하지 않아 크게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성공 사례는 한기범(205㎝) 서장훈 김주성(205㎝) 정도가 꼽힐 정도다. 특히 서장훈은 블록과 수비 지향적인 김주성과 달리 공격적인 플레이로 20여년간 한국 농구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서장훈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영원하다. 친정팀인 SK에 이어 삼성, KCC, 전자랜드 ,LG, KT 등을 거친 그는 프로에서만 15시즌을 뛰었다. 통산 688경기에 출전시간만 2만2,834분31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된 목 보호대가 상징하듯 상대방의 거친 수비로 인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큰 부상을 당해도 서장훈은 코트를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통산 득점 1위(1만3,231점)와 통산 리바운드 1위(5,234개)는 그가 남긴 역사다.
그 동안 서장훈은 한국 농구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등장 전까지 스타 선수들은 모두 키 작은 가드와 슈터였다. 이충희 김동광 김현준 이원우에 이어 허재 문경은 이상민까지.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 호쾌한 3점 슛으로 팬들을 열광케 했다. 하지만 김유택 한기범 전희철 등은 슈퍼 스타가 되기에는 2% 부족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실업 형님들을 제치고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끈 서장훈은 프로에서도 용병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몸싸움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골밑을 파고 든 결과 98~99시즌에는 리바운드왕에 오르기도 했다. 역대 유일한 토종 선수 리바운드 왕이다. 97년 프로농구가 출범한 이후 토종 빅맨들은 힘과 탄력에서 외국인 선수들에 밀려 포지션을 변경하거나 벤치를 지켜야 했지만 서장훈은 달랐다. 2m가 넘는 센터 중 유일하게 성공시나리오를 썼고 한국 농구의 자존심을 지켰다. 거인 서장훈은 수많은 대기록과 명장면, 이름 석자를 남기고 27년간 정들었던 농구공을 내려 놓았다. 이제 농구 밖에 몰랐던 국보 센터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여동은 스포츠부장 dey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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