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정부 부처의 세세한 정책 부분까지 일일이 챙기며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숙제'를 내고 있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나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수천 자가 넘는 지시사항을 언급하며 꼼꼼하게 관련 업무를 챙기고 있다. "미국의 직업군은 3만개나 되는데 우리와 다른 창의적 직업군을 연구하라""민원카드를 작성해 한 사람의 문제가 끝까지 해결되도록 하라" 등의 식이다. 이 같은 '디테일(detail) 리더십'을 두고 집권 초 조직 및 업무 장악을 통해 국정운영의 일관성을 꾀할 수 있다는 긍정론과 함께 대통령의 일방향 통행으로 장관들의 재량권이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테일 리더십'이 그대로 나타난 장면은 18일 수석비서관회의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공개발언 4,000자, 비공개발언 8,000자 등 원고지 60장 분량의 발언을 쏟아냈다. 상당 부분이 청와대와 정부에 국정철학 공유와 공약 이행을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비공개 회의에선 주문 사항만 13가지에 달했다. 첫 국무회의 역시 1시간가량의 회의 시간 대부분이 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채워졌다. 박 대통령은 13개 정부 부처에 구체적인 대응책 마련을 주문했고, 장관들은 부여된 과제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20일 "새 정부는 '국가'중심에서 '국민'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데 관료 조직이 아직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지시사항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며 "박 대통령이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하다 보니 세밀한 부분까지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랜 대선 준비 과정을 통해 내놓은 공약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이를 청와대와 내각에 체질화시키겠다는 얘기다.
청와대 주변에선 박 대통령의 발언의 의미만 제대로 포착해도 국정운영의 방향을 잡아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박 대통령의 발언 범위는 방대하다. 경제 부흥과 문화 융성 등 거대 담론부터 저작권, 미래창조과학부 약칭 등 정부 부처 명명, 대통령의 이니셜 문제 등 세밀한 부분까지 박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반면 국정의 큰 틀을 설계해야 할 대통령이 지나치게 장관 등의 업무추진력을 제한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토론'보단 '지시'가 많다 보니 가뜩이나 상명하복에 익숙한 관료들이 고위직에 대거 발탁된 상황에서 이들의 운신 공간이 축소될 가능성도 크다.
박 대통령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새 장관들이 공약과 상관없이 자신의 어젠다를 수행하려는 경향이 크다. 공약 따로, 장관의 어젠다 따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책임장관제 약속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발언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이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면 대선에서 약속한 책임장관제가 한계에 부딪칠 수 있고 공무원 사회가 더 경직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임기 초반에 국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인데다 대통령제의 책임장관은 장관 임의로 정책을 집행하는 것도 아니다"며 "오히려 기본적 국정철학을 숙지하지 못한 장관들이 어떻게 책임장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만기친람(萬機親覽ㆍ온갖 정사를 일일이 살펴봄)형 리더십은 집권 초반엔 공직 기강을 다잡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서도 "이런 리더십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부처의 자율성이 떨어져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게 돼 결국 정부의 탄력성이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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