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시인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달고 나타나서는 장독대와 기와지붕에 버젓이 누워 해바라기를 하거나 수돗가에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미 고양이는 나 같은 인간들의 눈길을 외면한 채, 아주 느긋한 동작으로 등을 곧추 세우고 거만하게 걸어 다녔다. 기와지붕 등성이에 호랑이 가죽 무늬를 누이고 살짝 양미간을 찌푸리고 낮잠을 즐겼다. 신발을 집어던지는 시늉을 해도 너 같은 놈이 차마 집어던지랴 하는 식이었다. 신발의 상표라도 훔쳐보는 기색도 아니었다. 나는 잔뜩 약이 올라 장독대 계단으로 올라갔지만 어미 고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긴 네가 마음대로 오를 수 없는 곳이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약이 올라 집어던질 것을 찾았다. 주위에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헛 몸짓만 하다가 제풀에 기가 꺾여 내려오고 말았다.
새끼는 아직 겁이 많아 어미 곁에 오지 못하고 또 다른 지붕에 웅크리고 앉아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는 겁이 많은 만큼 동작도 민첩했다. 우당탕탕 함석으로 된 물받이를 밟고 뛰는 것이 여간 민첩한 것이 아니었다. 인기척만 있어도 금세 모습을 감추기 급급했다. 어미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도 이때다 싶으면 도망가기 바빴다.
언젠가는 어미 뒤를 졸졸 쫓아 거실의 식탁에 앉아 살을 발라 먹은 갈비뼈를 싹싹 핥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미는 옆에서 새끼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주위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미 고양이는 마당에 내려오기를 겁냈다. 거기까지는 자기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힘없는 침입자인 줄을 알고 재빠르게 담을 타고 함석 물받이를 타고 지붕 어딘가로 도망치기 바빴다. 귀 떨어진 접시에 생선 가시를 담아 장독대에 내다 놓곤 했다.
처음 며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녀석들은 의심이 눈덩이 같았다. 우리는 훔쳐 먹거나 뒤져 먹는 게 전공이지 갖다 바치는 건 절대로 사양한다, 뭐 그런 식이었다. 거지 주제에 어지간히 거들먹거리는 놈들이었다. 약을 발라 놨을까 봐, 낚시 바늘이라도 숨겨 놨을까 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수고를 덜자고 하는 짓이라고, 자존심 상한다고, 놈들은 내 성의를 무시했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문방구에 가서 장난감 총을 하나 사 왔다.
홀쭉한 배에 한 방 먹여 줄 참이었다. 그래도 배가 부른가 보지? 안 먹고도 살 수 있나 봐라. 따끔하게 한 방 먹일 작정이었다. 어미는 새끼에게 느긋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우리는 먹는 것에 욕심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조금만 먹어도 된다. 나머지는 잠으로 채우면 된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적게 먹는 만큼 적게 움직이고 남는 시간 잠으로 보충하면 된다. 신경이 예민해서는 절대 안 된다. 무시한 만큼 오래 살 수 있다. 나는 장총을 겨누고 녀석이 나타날 길목을 지켰다.
아랫집 아이는 일곱 살인데 엄마가 없고 아빠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집에 들른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는 할머니 손에 길러지고 있다. 할머니는 굿을 할 사람을 찾아 무당에게 연결시켜주고 얼마큼의 지분을 얻어 생활한다. 할머니는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 종일 굿할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아이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간다. 할머니는 관여하지 않는다.
아이는 새끼 고양이를‘순진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없다. 아이만이 알고 부르는 이름이다. 아이는 오늘‘순진이’를 몇 번 보았다는 둥 어디까지 나왔다는 둥 호들갑을 떨곤 한다. 기왓장 몇 장 깨질 것을 각오하고 돌을 집어던지려고 하던 찰나에 아이가“안 돼!”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어미 고양이에게 돌을 던질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아이는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아저씨, 어미 고양이에게는 새끼가 있잖아요.” 아이는 어느 새 내 옆에 와 앉아 있다.“아저씨, 아프게는 쏘지 말아요.” 아이의 눈은 내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겨누고 있던 총구를 공중으로 돌리고‘팡’소리가 나게 방아쇠를 당겼다. 어미에게 새끼가 있는 만큼 새끼에게도 하나뿐인 어미가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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