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가 가족들에게 피해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해 재판 출석을 거부하더라도, 범행을 당한 직후 원스톱지원센터 등에서 상담한 기록이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최근 이 판결을 확정했다.
2010년 3월30일 경기 수원시에서 저지른 절도죄로 투옥된 주모(47)씨는 절도를 저지르기 보름여 전인 3월16일 인근에서 성폭행을 저지른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절도죄로만 16년 동안 수감된 상습 절도범인 주씨는 사실은 전국을 돌며 수 차례 여성들을 성폭행한 전력이 있었다. 감식 결과 주씨의 DNA는 2004년 인천과 대전에서 일어났던 주거 침입 성폭행 사건 용의자의 DNA와 일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DNA라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유죄 입증에 어려움을 겪었다. 피해자 3명이 모두 법정 출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성폭행을 당한 A(대전 서구)씨는 경찰 조사를 받고 신체검사까지 마쳤으나, 기록으로 남을 것을 우려한 아버지의 만류로 진술조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2004년 11월 성폭행dmf 당한 B(인천 남구)씨는 피해자 조사를 받고 A씨와는 달리 진술조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B씨는 결혼한 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사는 상태였다. 법원은 미국에 있는 B씨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친척들은 "절대 연락처를 가르쳐 줄 수 없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완강하게 거부했다. B씨의 배우자에게 B씨가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성폭행을 당한 C(경기 수원)씨는 범행 직후 인근 병원의 원스톱지원센터를 찾아 파견 경찰 및 상담사와 상담했다. C씨도 "피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며 법정 출석을 거부했다.
결국 주씨에 대한 1심 재판부는 B씨를 성폭행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8년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B씨에 대한 성폭행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 것은 해외 체류 중이라 법정에 출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진술조서를 유죄의 증거로 채택할 수 있도록 한 형사소송법 조항 때문이었다. 반면 연락을 받고도 출석을 거부한 A씨와 C씨를 주씨가 성폭행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 김주현)는 C씨에 대한 성폭행 혐의를 추가로 유죄로 인정, 주씨에게 총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1심과 달리 C씨가 원스톱 지원센터에서 받은 상담 기록에 대해 증거로서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상담 기록표와 면접서류의 작성자가 각각 경찰관과 성폭력 상담사로 성범죄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고, 작성자들이 1심 법정에 출석해 작성 경위를 진술했다"고 증거 채택 배경을 설명했다. 앞서 1심은 "원스톱 지원센터에서 작성된 상담 서류는 상담사 등이 피해자에게 전해 듣고 작성한 전문 진술(남에게서 전해 들은 것에 대한 진술)에 불과해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지 않는 이상 증명력이 낮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진술조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던 A씨에 대한 혐의는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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