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나면 전적으로 당신 책임입니다."
지난해 12월 중순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이모(53ㆍ여)씨는 이 말 한 마디에 식겁해 얼른 소화기를 내줬다. 이씨를 윽박지른 이는 '한국소방'이라고 적힌 주황색 점퍼 차림의 40대 남성. 이 가게 소화기는 교체한 지 1년 밖에 안됐지만 남성은 10여 분간 만지작거리더니 점검비로 3만원을 챙겨서 사라졌다. 이씨는 "얼마 뒤 주변 상인들의 말을 듣고서야 속은 것을 알았다"며 "항상 화재가 걱정인데다 소방서에서 나왔다면서 겁을 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허탈해했다.
최근 소규모 상점을 돌며 소방관을 사칭해 소화기를 강매하거나 점검비용을 요구하는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15일 피해 상인들에 따르면 이들은 종로처럼 좁은 골목에 작은 가게들이 밀집돼 화재에 취약한 지역에서 주로 활개를 친다. 소방점검을 빙자해 소화기가 없으면 과태료를 요구하거나 소화기 분말과 가스 충전, 교체를 강요하는 방식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상점에서 일하는 한은희(52)씨는 "올 1월 소방관 차림의 남성이 소화기를 점검하겠다는 것을 거절해 피해는 면했지만 심한 욕을 들었다"고 말했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서울에서만 최소 수십 건 이상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경찰이나 소방서에 신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피해액이 10만원도 안 되는 소액이고 대부분 한참 지난 후에야 사기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상황을 감지한 각 소방서들은 피해를 막기 위해 트위터 등 SNS를 이용해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서울의 한 소방서 관계자는 "소방공무원은 소화기를 강매하거나 교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소방관 복장으로 찾아오면 신분증부터 확인 뒤 경찰서나 소방서로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