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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는 인생 혹시 이름 탓?" … 삶의 전환점 찾는 이들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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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는 인생 혹시 이름 탓?" … 삶의 전환점 찾는 이들 발길

입력
2013.03.1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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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명리학·운명학서적 빼곡… 기업 중역 사무실 닮은 공간 '위엄'취업 안 돼서… 사업 안 풀려서 10년간 국민 44명 중 1명꼴 개명강남·종로 등서 180여 곳 성업 중"인생 180도 바뀌리라곤 생각 안 해" … 그래도 희망 품고 수십만원 선뜻

"이름이 뭐요?"

영화에서나 본 법사복 차림의 작명가 방모(73)씨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펼쳐 둔 만세력에는 낯선 문자와 기호들로 가득했고, 옥편 역시 예사롭지 않은 두께로 권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름만 바꾸면 구겨진 팔자까지 곱게 펴준다는 공간, 작명소. 연령 성별 신분 인격을 이름 하나로 수렴시키고, 운명의 상당 부분까지 그 두 글자로 풀이해 책임 지우는 기호의 공간. 군더더기 없이 툭 던져보는 듯한 방씨의 어조에서도 관록과 자신감이 엿보였다. 물론 그 모든 느낌들은 작명소의 권능을 믿고 따르겠다는 자발적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경진(競進), 경우(耕牛), 을해(乙亥), 갑자(甲子)라…"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방씨는 이름풀이를 끝낸 듯 '천기 누설'을 시작했다. "심신이 올바르고 의리가 있는데 고집이 세고 생각이 많은 성격이지? 이름은 뜻 지(旨)에 길돋을 용(埇), 뜻은 좋은데 사주와 이름이 맞지 않아. 크게 되지는 못할 거야." 그는 종이에 글자를 써서 건넸다. 민첩할 민(敏) 자에 승복할 승(承)자 "이 글자들을 써서 이름을 바꾸면 인생이 술술 풀릴 거요." 고개를 드니 그의 뒤쪽 벽면에는 '작명에는 20만원, (개명에 필요한)아호와 상호는 50만원' 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안내문이, 가격을 깎으려는 마음을 무지르려는 듯 결연히 걸려 있었다.

세련된 테이블과 육중한 원목 책상. 책상 위에는 최신 컴퓨터가 놓여 있다. 언뜻 보면 기업 중역의 사무실이나 교수 연구실 같다. 벽면으로 눈을 돌리면 한자가 가득 적힌 두루마리, 인도에서 건너온 듯한 만다라며 각색의 풍속화가 걸려 있다. 책장에는 사주팔자 명리학 운명학 성명학 책들이 켜켜이 꽂혀 있고 한국역리학회에서 발행한 회원증 액자도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방씨가 스리랑카 대통령과 함께 찍은 거라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눈 여겨 보는 기자에게 방씨는 "국내외 고위층과도 교류하고 있고 전(前) 대통령 가족과 대기업 회장 가족의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대성했다"고 말했다.

개명 신청, 10여년간 116만 명

오전 11시, 종로에서 한복집을 한다는 방헌례(63)씨가 작명소를 찾았다. 지난 밤 한복을 만드느라 밤을 샜다는 방씨는 피로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이름 바꾼다는 생각에 설레며 뛰어왔다"고, "이름으로 법헌(軒)에 의례 례(禮)자를 쓰는데 발음도 어렵고 여자 이름으로 어감도 안 좋고 뜻도 좋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장사를 하는데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고, 첫째는 장사가 안되고 둘째는 이혼했고, 손자는 엄마랑 떨어져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상담에 한 시간 남짓 걸렸을까. 방씨는 자신과 아들, 손자까지 3대의 이름을 샀다. 그는 "새 이름을 받으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이제 좀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5년 7만7,000여건이던 개명 신청은 2012년 15만8,960건으로 두 배 넘게 늘었다. 2001~2012년 개명 신청한 사람은 모두 116만명, 국민 44명 중 1명 꼴이다. 개명이 늘면서 작명소를 찾는 사람들도 증가했다. 정수역학연구소 정수 원장은 "신생아 감소로 작명 고객은 줄었지만, 2005년 대법원에서 개명을 폭넓게 허용한 이후 개명 손님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며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30%정도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20만~110만원, 온라인은 반값 할인

작명소에서 '이름'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동기나 목적은 제각각이다. 최아라(가명ㆍ28) 씨는 예쁜 이름을 갖고 싶어 개명을 신청했다. 그는 "예전 이름이 여자 이름 치고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 늘 바꾸고 싶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획수와 뜻도 좋지 않다고 하더라.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지만, 내 마음에 드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슨 곡절이 있어서도 아니고, 운명론을 믿어서도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옥남(가명, 50) 씨는 아이 때문에 이름을 고친 경우. 아이는 학교에서 손꼽히는 수재였고 학원에서도 서울대 특별반에 들었고 모의고사 점수도 항상 우수한데 삼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시험 시간만 되면 눈앞이 노래지고 배가 아파 시험을 망친다는 것. 김씨는 "내 이름이 나빠 아들 앞길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름을 안 바꾸곤 못 배기겠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름을 바꾸고 나서 사람들이 내게 인상이 밝아졌다고 말한다. 이름 때문에 운명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분은 훨씬 나아졌다"고 덧붙였다.

취업이 안 돼서, 사업이 안 풀려서, 연애를 못해서, 몸이 자꾸 아파서…. 개명을 위해 작명恬?찾는 사연들은 다양하지만 그들은 너나없이 "사는 게 답답하고" "삶의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이들이었다. 태어나 이름을 얻듯, 새 이름을 얻어 이제부터라도 새 삶을 살고 싶은 거였다. 새로 얻은 이름으로 모든 걸 바꾸고 고치고 만들어야 하는 수고와 비용조차 그들에게는 달게 감당해야 할 진통일 뿐. 하지만 취재 도중 만난 어느 누구도 이름하나 바꾼다고 인생이180도 달라지리라 믿는 이는, 적어도 그렇게 말하는 이는 없었다. "해도 해도 안되니까 이렇게라도 해보는 거지. 그래도 해놓고 나니 홀가분한 게 힘은 나네."

한없이 희망적인, 한없이 상업적인 공간

작명소는 서울 강남 인근에만 어림잡아 120여 곳이 있고 종로에도 60여 곳이 성업 중이다. 한 포털 사이트에는 1,000 개가 넘는 온라인 작명소가 등록돼 있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도를 넘어선 마케팅 사례도 있고, '이런 작명가들은 조심하라'는 식의 차별성 안내문을 내건 곳도 있다. 홈페이지와 각종 매체 광고는 기본, 외부 강연과 자비 출판 등으로 이력을 보강하는데 혼신을 기울인 기색들도 역력하다.

작명 비용은 대략 20만~50만원 선. 116가지 '특별 비법'을 동원하는 '특별 작명'이라며 110만원을 부르는 곳도 있고, 인터넷으로 구입할 경우 50% 할인해준다는 곳도 있다. 작명소를 여는 데는 허가도 자격증도 필요 없다. 작명가마다 작명법이 다르고, 기준도 한결같지 않다. 같은 이름을 두고도 감정 결과가 사뭇 엇갈리기도 한다. 이름에 기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이들, 이름의 주술성에 집착하고 개명에 얽매이는 것을 정신적으로 미숙한 짓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그런 지적에 대해 한 작명가는 "인생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작명소를 안 온다.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들만 여기 온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할만큼 했는데 제대로 되는 일은 없고, 누굴 탓하고 싶어도 마땅한 대상도 없고, 세상을 탓해보지만 공허하기만 하고…, 그래서 용하다는 점집도 찾아 다녀보고, 석삼년 만에 조상 찾아 묘에 큰절도 올려 보다가…, 그러다가 생각이 미치는 것이 개명이고, 찾는 곳이 작명소인지 모른다. 요컨대 작명소는 그런 이들에게 탓할 뭔가를, 이름을, 콕 집어내 보여주는 곳이다. 옛 이름을 부정함으로써 가까스로 나마 자신을 긍정하게 해주는 곳. 작명소는, 누가 뭐라건 그런 애절한 희망이 거래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얘기다.

다만 그래도 알아야 할 것은 있다. 고전학자로 라는 책을 쓴 서경대 국문과 이복규 교수는 이렇게 조언했다. "사주팔자나 명리학은 운명결정론이다. 그 자체로 결코 건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인생이 다르고, 동일한 이름을 놓고도 해석들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좋아하는 이름들을 자유롭게 골라 쓰면서도 잘 산다. 발음하기 쉽고 의미와 느낌이 좋으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명리학이 우리 문화에 끼친 영향이 있고, 우리가 그 문화의 자장 안에 사는 한 꺼림칙한 뭔가가 있으면 작명소에 갈 수 있다. 대신 지나치게 의존하지는 않아야 한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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