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부터 닷컴 버블이 꺼진 2000년까지,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세기말'의 모습이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한 듯하더니 갑자기 벤처 열풍이 불며 주가지수가 하늘 모르고 치솟기도 했다.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고 절망하는 와중에 다른 누군가는 벼락부자가 되기도 했다.
이때는 세기말적 분위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각광을 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예정된 인류의 멸망(서드 임팩트)을 앞두고 진행되는 이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을 일으켰다면, DJ정부의 일본문화 개방정책 덕에 2000년 이후 국내에서 개봉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그 바람을 이어갔다.
이보다 앞서 가장 먼저 국내 영화관에 걸렸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은 였다. 일본에서 1984년에 개봉됐던 하야오의 대표작이 무려 16년 뒤인 2000년 12월 말에야 한국에서 개봉된 것이다. 청계천 상인들이 LD 판을 무단 복사해 팔았던 비디오테이프 대신 넓은 스크린에서 선명한 화질의 나우시카를 보는 기분은 남달랐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의 감정은 비디오로 처음 접했을 때처럼 감동적이지만은 않았다. 쉽게 풀기 어려운 갈등을 소녀의 순교를 통한 '기적'을 통해 너무 쉽게 해결해 버리는 점이 영 찜찜했다. 문제의식을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고 도중에 주저앉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불만은 영화 개봉에 이어 출판된 7권짜리 만화책을 접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애니메이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82년부터 잡지에 연재하던 만화의 초반 부분을 완결된 영화 형식에 맞게 각색한 것으로, 이야기의 서두에 해당한다.
영화가 바람계곡이라는 작은 마을과 토르메키아라는 국가 사이의 갈등을 다뤘다면 만화책은 토르메키아와 도르크라는 두 국가 간의 전쟁이 중심으로 훨씬 스케일이 크다. 전쟁의 참상도 사실적이고 잔인하게 묘사됐다. 영화 속 나우시카가 자연과 소통하는 '신비로운 소녀'였다면 만화 속 나우시카는 거대한 전쟁을 잔다르크처럼 이끌어나가는 '성스런 전사'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주제의식이다. 영화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공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만화는 인간의 원죄와 존재 의미를 다루고 있다. 결말부에서 인간이 살 수 없는 강한 독기를 지닌 숲인 '부해'는 과거 세상을 망가뜨린 인류의 선조가 자신들의 원죄를 속죄하고 지구를 오염 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게다가 선조들의 기술로 세계가 완전히 정화되면 현재 오염된 세상에서 적응해 살고 있는 인류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나우시카는 여기서 속죄 대신 '오염된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선택, '성자'가 아닌 '인간'이 된다.
무려 12년 동안의 장기 연재 끝에 결말을 낸 이 책의 주제의식은 '죄의식을 견디고 일단 살아남으라'는 것이다. 여러 작품에 걸쳐 반복되는 '살아야 한다'는 미야자키 감독의 메시지는 종종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에반게리온과 정반대되는 것처럼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만화책 나우시카를 읽어보면 오히려 에반게리온이 나우시카의 주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에반게리온에서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려는 비밀의 집단인 '제레'는 나우시카의 선조들처럼 인류가 자멸함으로써 원죄를 '속죄'하려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 신지의 어머니는 인류가 에반게리온이라는 단 한 명의 완전체 인간이 되어 영원히 살기를 바랐고, 일단 그 뜻을 따랐던 신지는 최종적으로 다수의 인간이 불완전하더라도 각자의 삶을 살자고 결정한다. 나우시카의 역할을 신지가 하는 셈이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우시카나 에반게리온을 보고 있으면 다시 세기말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잠깐 즐기고 잊어버리는 대신 텍스트로서 읽고 분석하던 시절 말이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웰메이드' 상업영화뿐 아니라 작가주의 영화도 어느 정도 관객을 모았다. 몇 번이고 다시 보고 곱씹으며 작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야말로 진정 영화를 보는 행위로 여겨졌다. 곳곳에 퍼즐처럼 상징과 복선을 숨겨 놓고 관객을 위한 빈 자리를 만들어 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환영 받은 것도 분석 가능한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일들이 '지식인인 체 하는 자들의 허영 가득한 지적 유희'로 폄하된다. 그 많던 영화 잡지들이 거의 다 사라진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지만 그때가 그리운 것은 나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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