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고립된 섬장애인·한부모 가정 등 영세민만 3000가구노인들은 소일거리 없고 아이들 위한 공간도 없어구조적 문제도 고통지열 없어 도로 결빙엘리베이터·층간소음… 수리 요청해도 외면행복주택 더 짓겠다면분양아파트와 섞어 짓고 공동체 관련 사업 도입주민 구성도 다양화해야
서울 양천구 신정동 양천아파트가 새삼 주목 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철도부지(이후 철도ㆍ공공유휴 부지 등으로 확대) 행복주택'을 연상시킨 덕이다. 이 아파트는 신정차량기지 위에 1만 개가 넘는 기둥을 박고 만든 인공대지에 흙을 4m나 덮은 뒤 아파트를 지었다. 정치인들도 관심을 보이기 때문인지, 최근 국회의 자료 요청을 받은 SH공사가 직원을 파견해 안내판과 단지 안을 찍어 갔다고 한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내놓을 자료가 거의 없어 그저 사진만 찍고 돌아들 간다"고 했다.
새 정부의 행복주택은 그간 비용, 진동 및 소음, 법적 걸림돌, 시장 교란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본보 2월 1일자 6면)됐다. 대부분 기술적이거나 정책 대응 차원(하드웨어)이다. 박 대통령이 "내가 저 행복주택에 입주하려고 한다, 이런 마음으로 정책을 만들어달라"고 당부한 걸 감안하면 입주민들의 삶의 질(소프트웨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양천아파트 주민들의 삶을 들어봤다.
"한마디로 '도심 속 고립된 섬'이죠. 어디 가서 여기 산다고 하면 말투랑 눈치가 달라져서 말도 못 꺼내요." 주민 김모(60)씨는 "이런 걸 더 짓는다고요"라고 반문했다. 주부 박모(46)씨는 "주변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면 무시당하는 일이 많아 애들이 방과 후엔 동네에서만 논다"고 했다. 일종의 '낙인 효과'를 걱정한 것이다.
장애인, 한부모 가정, 독거노인 등 영세민만 2,929가구(총 2,998가구 중 69곳은 빈집)가 살다 보니 주변환경도 열악하다. 소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은 중심도로에서 가까운 정자에 모여 술을 마시는 게 일상사다.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례도 많다. 주부 김모(51)씨는 "동네에서 술이나 마시며 어슬렁대던 애들이 어느 날 안보이면 소년원에 간 것"이라며 "한부모 가정처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보살필 시설이나 공간이 없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었다. "인공대지라 지열(地熱)이 없어 겨울에 도로 결빙이 잦고, 층간 소음과 엘리베이터 소음이 심해요." 18년을 살았다는 박모(46)씨는 "10년마다 한번 SH공사에서 도배를 해주는데 벽지가 붕 떠서 보수를 요청했더니 들은 체도 하지 않더라"고 불평했다. SH공사 소유라 집수리도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철도 소음과 진동에 대해선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차량기지와 접한 동(103, 105, 107동) 주민들은 새벽녘에 지하철 소리가 들리고 진동이 느껴진다고 했으나 큰 불편을 호소하진 않았다. "없이 사는 형편에 이 정도(월세 10만~12만원)면 만족한다"는 주민도 많았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고 생활이 불편해도 어쩔 수 없는 처지라는 자조가 느껴졌다.
다만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과 비슷한 행복주택을 짓는다면 몇 가지를 꼭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분양아파트랑 섞어 짓고 주민 구성도 다양화해야 한다"(원모씨ㆍ63), "평수(현재 14, 17평)를 늘리고 주방도 넓혀야 한다"(김모씨ㆍ74), "노인과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김모씨ㆍ51) 등이다.
전문가의 의견도 비슷했다. 일본의 철도부지 임대주택을 둘러보고 온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임대주택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소셜 믹스(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를 한 단지에 섞어 짓는 것)와 제네레이션 믹스(노인세대와 젊은 세대를 섞어 살게 하는 것)를 도입하고, 자활공동체,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등 정부가 시행 중인 공동체 관련 사업을 개발단지에 이식해야 행복주택의 정착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20만 호 공급목표에 집착하지 말고 시범단지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라"고 조언했다.
행복주택의 구상은 '신혼부부, 고령층, 대학생을 위한 신개념 복합주거타운 건설'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달랑 사진만 찍고 갈 일이 아니라 주민들의 진솔한 얘기를 꼼꼼히 들어봐야 한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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