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사회는 힐링(healing)이 아니라 킬링(killing), 즉 분노가 필요 합니다. 잘 읽혀지는 에세이들로는 사회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 없습니다. 전부 불합리에 적응만 할 뿐 분노하지 않는 게 문제예요. 제 책 역시 자기 시간을 천천히 가도록 계획하라는 게 아니라 다른 시간을 창조하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철학에세이로는 드물게 6만부가 팔리는 이변을 낳았던 의 저자 한병철(54)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가 국내 새 책 출간에 맞춰 방한했다. 이번 책은 보다 한 해 앞서 2009년 독일에서 출간된 (문학과지성사 발행)로 김태환 서울대 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일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나는 멈춘다. 고로 존재한다'로 전환할 것을 주문한다. 노동에 압도되어 노예로 사는 현재의 시간을 분쇄하고 다른 시간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1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에 이어 이 책을 통해 한번 더 '빨리 빨리'의 조급증이 만연한 성과사회 한국에 자극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동하는 일용직조차도 성과주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적인 사고가 그만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모두 탈진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바보이니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성과주의에 매몰되는 건 문제입니다."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전공한 그는 가 독일, 한국은 물론 유럽을 중심으로 9개국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주목 받았다. 역시 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시간 자체는 노동과 소비의 시간일 뿐 진정한 시간이 아니며, 효율적인 시간 관리 기법 따위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는 독일에서 10만부쯤 나갔습니다. 독일에서는 유명 철학자들이 쓴 책도 3,000부 나갈까 말까 하는데, 인문학 독자들과 사회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찾아 읽은 거죠." 독일에서도 학자들은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며 "독일 학자들도 학문의 미라가 되어 죽었지만 살아있는 '좀비'가 된 지 오래"라고 꼬집었다.
한 교수는 능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치유해야 하는데 '네가 문제가 있다'고 개인만 치료하자고 드는 건 잘못"이라며 "정신이 있어야 어떤 행위가 가능한 건데 너무 정신 없이 살고 있고 그래서 피곤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독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재앙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다'고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고 소개하며 변혁을 위해서는 다소 충격적인 언어를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언론은 그에게 '걱정 상자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시사 주간지 슈피겔에서는 '항상 기분이 안 좋은 철학자'라고도 하더라"는 그는 "인문과학이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독일 사회에서 인문학을 정치화하고 사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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