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이런저런 이유로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한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끝내고 꿀맛 같은 휴식을 보내던 2007년말 일본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일본배급사에서 '미녀는 괴로워'의 제작자로서 일본개봉을 앞두고 내 사인이 필요하다고 급히 일본으로 오라는 거였다.
난 가족과의 휴식이 반토막나는 상황에 투덜거리면서 일본행 비행기를 타러 밴쿠버공항에 갔다. 일본항공이었는데 항공사 직원이 수속을 하면서 "당신 아주 럭키하다"고 하였다. 사실인즉 일본 고교생들이 록키산맥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길이라서 좌석이 예약초과 되어 나 같은 단독여행자들이 본의 아니게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었다. 행운은 연달아 온다고 좌석이 업그레이드된 것과 더불어 내 옆에 20대 빼어난 미모의 일본여성이 앉게 되었다. 혼자 캐나다여행을 즐기던 그 일본여성은 비즈니스석이 처음인지 아주 생경해했다. 난 자연스럽게 비즈니스석에 대해 설명 해주고 실내화도 꺼내서 사용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비치된 메뉴판까지 상세히 설명해주면서 비즈니스 좌석은 이코노미 좌석과는 달리 메뉴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으며 음식도 은식기에 담겨 나오는 거라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일본여성은 자신은 태어나서 비즈니스석은 처음 타본다며 너무나 신기해했다.
비행기는 드디어 이륙하였고 나는 스튜어디스에게 와인 두 잔을 부탁해서 그 일본여성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조그만 무역회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하고 요리공부를 해서 자그마한 식당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여성이었다. 요리공부를 하기 전 자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 캐나다여행을 계획했는데 마지막에 비즈니스석에 앉게 되어서 앞으로 자신에게 행운이 올 거라며 즐거워했다.
나는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영화제작자인데 5시간이상 장거리여행을 하게 되면 항상 비즈니스석을 이용하고 있고(사실 마일리지를 사용해 비즈니스석을 단 한번 타 본적이 있다), 이번에도 일본에 영화가 개봉하게 되어서 도쿄에 간다고 하였다. 그녀가 무슨 영화를 만들었냐고 물어보기에 난 일본만화가 원작인 '미녀는 괴로워'를 만들었다고 하자 갑자기 그 여성이 급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도 그 만화를 너무나 재미있게 봤는데 예상치 않게 그 제작자를 비행기에서 만나다니 너무나 영광이다 하면서 너무 신기해했고, 곧이어 나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어쩐지 스타일이 예술가 같았다,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는 등등.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슬쩍 명함을 건네주고 기회가 되면 시사회에 오라고 하자 그녀는 거의 실신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이 꼭 시사회에 참석 할거고 그리고 감사의 답례로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서 몇 번이고 영광이다, 시사회에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꿈결같은 시간이 지나고 식사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스튜어디스들이 메뉴판을 들고 뭐 드실 거냐고 물어 봐야 할 시간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들이 이코노미석 식판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급당황하기 시작했다. 옆 여성에게 친절히 설명한 상황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순간이 연출된 것이다. 알고 보니 2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코노미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어 비즈니스석 음식이 미처 준비가 안 된 것이었다.
나도 옆의 일본여성도 순간 얼어붙었다. 나는 불과 두 시간 전 유명하고 성공한 영화제작자이자 예술인에서 현재는 마치 옆자리 젊은 여성을 유혹하려고 한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전락해 버린 꼴이었다. 너무나 창피해서 밥을 먹을 수도 그렇다고 그녀 옆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수백만 원짜리 비즈니스석이 나에겐 화물칸보다 못한 고통의 좌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일곱 시간 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난 오지 않는 잠을 자거나 좌석에 앉지도 못하고 화장실 앞에서 스트레칭만 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그녀는 내 명함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우리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고 우리가 인생에서 다 겪은 일이다.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는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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