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패션 블로그의 칼럼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비롯한 온라인에서 큰 화제가 됐다. '보그 병신체에 대한 단상-우리시대의 패션언어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이 글은 패션을 삶의 양식으로 보고 전시, 공연 등의 문화 콘텐츠로 담아내는 '패션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김홍기(41)씨가 썼다. 칼럼은 대표적인 패션 전문지를 인용해 패션 저널리즘의 외래어 남용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예컨대 '이번 스프링 시즌의 릴랙스한 위크엔드, 블루톤이 가미된 쉬크하고 큐트한 원피스는 로맨스를 꿈꾸는 당신의 머스트 해브'처럼 영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고 조사만 한글로 적는 국적불명의 언어는 '다가오는 봄, 여유 있는 주말 데이트를 위해 청색의 귀여운 원피스를 골라보자' 식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스스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뉘앙스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오래 전부터 떠돌던 '보그 병신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제목으로 내세운 글을 공개적으로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11일 만난 그는 자신은 한글 옹호론자가 아니라며 "공멸 위기에 놓인 패션계의 의식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보그'는 오늘날 패션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한 중심축이죠. 뉴욕에서 창간해 세계 각지의 고유 패션을 담아낼 수 있는 나라별 판본으로도 나오고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처럼 외래어를 나열한 한국어판 보그가 과연 우리나라 고유의 유행과 삶의 방식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서양복식사를 중심으로 발달해 온 패션계의 특성상 한글로 완벽하게 옮기기 어려운 영어, 불어 표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는 "패션계가 그만큼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저도 '스타일'이나 '핏(fit)'을 한글로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색채의 경우 영어만큼 다양한 한글 표현이 없다면 그건 우리말로 정성스럽게 옮기고 대조해 관련 분야를 성장시키는 방향성을 못 만들었다는 의미 아닌가요? 새로운 어휘가 늘면 표현 방법도 다채로워지고 생각도 깊어지는 법이잖아요."
한 대형 백화점의 아동복 구매 담당으로 5년 가까이 일하던 그가 패션 큐레이터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영국 런던에서 접한 '패브릭 오브 비전'이라는 전시가 결정적이었다. 미국의 패션 칼럼니스트 앤 홀랜더가 기획한 행사로 옷의 주름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미감을 풀어낸 전시였다. 이를 계기로 "패션 강국에는 있는 패션 큐레이터가 한국에는 왜 없을까"를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패션의 흐름을 돌아본다는 게 결국 미의 기준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구체화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도 중요한 복식사는 간과하고 마케팅만 강조하는 게 한국 패션계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직 보편화하지 않은 패션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한국에서 정착시키기 위해 하고 싶은 일도 많다. 현대미술과 패션을 결합한 전시회와 유명 디자이너의 생애를 담은 영화 기획은 물론 패션 전문 도서관도 열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결국 그에게 패션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가 소중한 것임을 알려주는 선물"이다. "새롭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길러내는 것이 당대 예술의 관건이라면 내가 살아있음을 매일 확증하게 하는 패션은 그 임무를 달성하게 하는 첫 번째 예술 장르죠."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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