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넘게 살던 집에서 지난주 이사를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 옆 동으로 가는 것이지만 만만치 않았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책을 옮기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갖고 있는 책은 대략 5,000~6,000권 정도. 대학시절 보던 전공서적과 인문 교양서부터 출판기자를 하면서 모은 책, 유아용 그림책과 동화책까지 종수와 수량은 작은 동네도서관 수준이었다. 때문에 방 두 칸짜리 좁은 집 거실과 방은 대부분 책으로 둘러싸였고, 곳곳에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안보는 책들을 간혹 정리했지만 한강에서 물 떠낸 자리처럼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삿날을 정하고 이삿짐센터 직원을 불러 견적을 받았다. 콧구멍만한 집안 세간이라고 해봐야 변변치 않고, 그마저 낡아 대부분 버리기로 했으니 남은 건 책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쩍 벌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책은 무거워서 박스에 반만 채워야 하고 또 꺼내서 정리하려면 시간도 꽤나 걸리니 다른 물건과는 달라요." 한마디로 이사비를 더 달라는 얘기다. "아니 뭐 깨지는 것도 아니니 특별히 조심스러울 필요도 없고, 상자만 갖다가 착착 쌓아 바퀴 달린 수레로 옮기는 건데요"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새 집은 방이 세 칸짜리다. 실내공간 설계를 새로 하면서 큰맘 먹고 제일 큰 방을 아예 서재 겸 아이 방으로 정했다. 벽면 두 쪽에다 붙박이 책장을 맞춤 제작했다. 이도 모자랄 것 같아 거실 한 면도 책장 자리로 내주었다. 세 식구가 함께 앉을 수 있는 큼지막한 탁자와 의자도 마련했다. 이 비용만 해도 적지 않았다. 사실 책이란 게 제목과 저자 이름이 보이지 않게 쌓아놓으면 폐지나 다름 없다는 생각을 늘 해오던 터라 아낌없이 질렀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이삿날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책을 마구잡이로 꽂고 있었다. 분야별로 분류해놓은 책들을 섞은 것은 그렇다 치고, 대하소설이나 전집 등을 낱권씩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 한번 뒤섞인 책을 뒤늦게 바로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이참에 책 구조조정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주말 온종일 책 정리에 매달렸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먼지를 마시며 정리하는 작업은 고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색다른 재미도 있었다. 대학시절 책을 살 때마다 책 앞장에 적어두었던 일기식 메모나, 책갈피 사이에 꽂아 두었다가 뒤늦게 빛을 본 고교시절 단짝 사진과 편지는 나를 30년 전으로 이끌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책이나, 언젠가 애타게 찾다가 포기한 책도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책을 대거 퇴출시키겠다는 각오는 어느새 누그러지고 말았다. 대학 진학후 30년간 내 옆에 있던 책은 단순히 책이 아니라 식구이고, 추억이고, 인생이었다. 결국 쫓겨날 책은 훌쩍 커버린 아이의 수준과 도저히 맞지 않는 유아용 그림책뿐이었다.
구글에서 '너무 많은 책과 함께 사는 문제'(The problem of living with too many books)를 검색해보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실제 뉴욕타임스는 오래 전 이같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혹 노하우가 있을까 하여 대충 훑어봤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만화방이나 도서관처럼 바퀴 달린 책꽂이를 여러 겹 배치하여 좌우로 밀칠 수 있도록 한 것 정도였다. 나는 궁리 끝에 책장 안쪽에 책 서너 권을 겹쳐 계단을 만들고 그 위에 책을 꽂아 넣었다. 또 그 앞쪽으로는 키 작은 책들을 배치하니 기존 수용량보다 두 배가 늘어났다.
서재를 정리하고 나니 오랜 연금 상태에서 풀린 책들이 일제히 환호하고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주인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이제 저 좀 빼서 읽어주세요!!! 제발." 이 공간에서만큼은 나폴레옹, 진시황, 대통령도 나의 간택을 애타게 기다리며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자다. 이제 집에서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최진환 문화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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