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따스해진 시선, 상처 껴안으며 희망을 틔우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따스해진 시선, 상처 껴안으며 희망을 틔우다

입력
2013.03.12 11:29
0 0

소설가 조경란(44)은 소설 연재를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청탁을 받고 마감 시한에 맞춰 소설을 내놓는 일도 없다. 이야기가 스스로 찾아오길 기다렸다가 받아쓰고, 3~6개월은 고치며 묵혀둔 소설들이라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다. 단편들을 묶을 땐 앞서 펴낸 작품들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버리기까지 한다니, 그가 5년 만에 펴낸 새 소설집 (창비)은 조경란이 쓴 가장 좋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고 봐도 좋겠다. 게다가 그는 장르의 시적 특징을 애모하여 장편보다는 단편을 편애하는 소설가다.

스스로는 "소설 쓰기에 재능이 없다는 걸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탓"이라고 몸을 넙죽 엎드리지만, 그 까다로움은 이 1990년대 산(産) 작가가 18년째 쉼 없이 소설이라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실패한 외줄타기'를 계속해온 원동력일 것이다.

은 조경란 소설의 변곡점이라 할 만하다. 소설에는 여전히 상처 받고 고독한, 함께인 것이 불편한 개인들이 등장한다. 주로 가족들이다. 이 최초의 인간 관계는 '몸 속 깊이 서로의 송곳니를 작살처럼 쑤셔 넣었던'('파종') 것으로 그려지고, 함께이지만 모두 홀로인 이들이 살아가는 곳은 '별과 달마저 내성적으로 빛나는' 공간('학습의 生')이다. 하지만 고립된 내면의 개인들이 맞닥뜨리는 소통의 부재와 두려움이라는 조경란의 오랜 주제는 어느새 연민과 이해로 방향을 틀었다.

스타벅스 텀블러에 맥주를 담아 다니며 하루 종일 홀짝거리다가 대학 교직원 자리에서 쫓겨난 '나'는 알코올의존증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가 꽃씨인 줄 알고 잘못 심은 시금치 씨앗을 남몰래 소중히 키운다.('파종') '내 몸이 나를 적으로 여기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무서운 질병을 앓고 있는 또 다른 '나'는 홀로 요양중인 외진 시골 마을에서 투포환을 하고 싶어하는 소년을 위해 집 마당에 커다란 원을 그려주는 고요하고도 단호한 내적 결단을 보여준다.('학습의 生')

"소통불가의 관계라는 것이 이젠 고통이 아니라 내가 껴안고 가야만 하는 일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달까요. 불화의 이미지보다는 조금 더 소통하고 섞이고 싶어하는 화자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조경란은 그 변화를 "뾰족했던 젊은 날에는 나에게만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했다면, 지금은 타인과 세계에는 너그러워지고 자신에게는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경란은 마흔 무렵을 호되게 앓았다. 무엇보다 "젊다는 자부심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싱글의 전업작가로 평생을 살아가는 이 삶을 계속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은 자전적 소설 '봉천동의 유령'을 낳았다. 조경란의 문학적 자궁이었던 봉천동의 옥탑방은 이제 다시 소설에 등장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중앙동 은천동 등으로 대체된 채 말소되어 버린, 판자촌의 이미지를 운명처럼 짊어진 '봉천동'이라는 이름이 그를 다시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사라진 주소로 인해 이제 나의 서정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차린 거죠. '잘 가라, 내 청춘' 하고 작별을 건네는 심정으로 쓴 소설이라 완성도와 관계 없이 가장 애착이 가요." 그곳은 조경란에게 집을 떠나고자 하는 열망과 '아무리 먼 데로 떠나 있어봐야 그것이 곧 집으로 이어진 길이라는 씁쓸한 순종의 느낌'을 동시에 심어준 공간이다. 이국으로, 지방으로,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봉천10동 41번지의 딸들이다.

표제작 '일요일의 철학' 속 화자는 누가 봐도 조경란 그 자신이다. 미국 서부의 조용한 대학도시에 머무는 그는 마흔 살 생일을 앞두고 혼자 더듬거리며 연습했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처음으로 언덕길에 선다. 주홍빛 태양에 눈부셔 하면서, 그는 누가 등 뒤를 세게 한번 밀어준 것처럼 미끄러지듯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읊조린다. '속도가 붙었고 나는 다시 앞을 내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서정시대 이후라고 소설이 씌어지지 않을 리 없다. 이것은 다만 새로운 시대에 임하는 작가 자신의 고백이자 다짐인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