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전에 갔다. 두 개의 자화상 앞에서 걸음이 붙들렸다. 두 그림 옆에는 각각 X선 촬영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워낙에 가난했던 이 화가는 자주 캔버스를 재활용했다고 하는데, X선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그림 밑의 숨은 그림, 그러니까 실패한 그림의 윤곽이었다.
내 발길을 붙잡은 것은 그 기묘한 겹침이었다. 자화상 밑에 숨어 있는 것은 여자의 누드 상반신. X선으로 현상된 얼룩덜룩한 흑백의 음영 속에서 여자의 흔적이 간신히 잡혔다. 한쪽은 올림머리와 둥근 가슴. 다른 한쪽은 풀어헤친 긴 머리. 희미하고 음산해서, 차라리 한 맺힌 원혼을 찍은 심령사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은 실패했고 그 위에는 반 고흐 자신의 얼굴이 덧입혀졌으니, 희미한 저 두 여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셈이다. 있기는 있되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존재. 유령과 다를 바 없다. 그림들을 불태워버리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기회도 오지 않을 것이다.
멋대로 그림제목을 다시 붙여본다. 한쪽은 '긴 머리 귀신을 업고 있는 자화상.' 다른 한쪽은 '벌거벗은 귀신 옆의 자화상.' 보이지 않는 손이 반 고흐의 어깨를 짚고 있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입술이 반 고흐의 귀에 중얼중얼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은 여자의 그 속삭임 때문에, 훗날 그는 자신의 귀를 잘라야 했던 건 아닐까.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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