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이 맞지 않아 최근 2년 전세살이를 했다. 내 집은 전세로 빌려주고 그보다 싼 아파트에서 살았다. 전세 계약 마감이 지난달 말이었다. 셋방살이를 접고 내 집으로 옮길 계획이었는데 아직 이사를 못 하고 있다.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세입자와 계약을 못했기 때문이란다. 갑자기 몇 천 만원 전세보증금 올리겠으니 낼 형편 안 내면 방 빼라는 주인 보다 나을지 모르나 횡포에 가까운 건 오십보백보다.
전세금 받아서 이사 갈 집에 살던 사람들 보증금 내줘야 한다고 몇 달 전부터 말했고 계약만료일까지 해주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고도 당당했다. “계약 끝나면 주려고 억대 보증금을 현금으로 갖고 있는 주인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느냐”는 거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전세보증금의 연쇄고리를 붕괴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마저 발동해 발에 땀이 나도록 돈 빌리러 다니면서 전세가 세입자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인지 새삼 생각했다. 월세라면 이런 고민은 없어도 될 텐데, 이래서 주로 세입자를 위하는 임대차보호법이란 게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세 제도는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임대차 제도다. 때로 부침이 있긴 했지만 한국에서 부동산 가격은 경제성장과 함께 거의 상승 일변도였다. 안정적인 주거공간 확보와 재테크를 겸해 다들 주택 소유를 목표로 삼았고 이때 전세가 매우 효과적인 지렛대 역할을 해왔다. 목돈을 조금이라도 손에 쥔 세입자의 경우 생활비의 일부를 쪼개 월세를 내야 하는 부담도 덜어줬다.
집값이 더 오를 일 없을 거라는 전망이 대세가 되고 저금리가 길어지면서 목돈 굴릴 데가 마땅치 않자 전세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집주인의 보증금 횡포도 같이 줄어들 테니 환영이지만 걱정도 없지 않다. 목돈 있는 사람의 경우 은행 이자보다 높은 월세가 당장 부담이다. 전세를 월세로 바꾸면서 과도한 액수를 요구하는 집주인의 또다른 횡포에 시달릴 수도 있다. 전월세 전환율 상한에 대한 명확한 규제, 저소득계층에 대한 월세 지원 등 전세 전성기 때보다 더 꼼꼼한 임차인보호제도를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지금 살던 아파트의 전세 계약이 끝난 뒤 바로 이사 가려던 집은 세입자가 나가고 비어 있다. 5년 가까이 빌려준 데다 곧 들어가 살 곳이니 집 상태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 집에 가보고 이번에는 집주인의 처지가 되어 아연했다. 얼마나 물을 튀기면서 욕실을 썼는지 멀쩡했던 욕실문 아래쪽이 다 썩어 있었다. 세면기에서 넘친 물이 흘러 내려 세면대 아래 나무바닥도 들떴다. 방문틀에는 못자국이 선명하다. 보수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일본생활이 생각 났다. 한국은 표준임대차계약서가 계약 당사자의 인적사항과 부동산 소재지, 보증금 액수, 임차 기간 등 여섯 가지 기본 항목만 기록하고 돈을 주고 받으면 끝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내용들 외에도 집에 몇 사람이 거주하는지, 애완동물을 키우는지, 피아노는 두는지,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지까지 따져서 확인한다. 계약이 끝난 뒤에는 주인이 집 상태를 점검한다. 세입자 부주의에 따른 집안 손상은 마루바닥 긁힌 것까지 꼬집어서 복원 비용을 물린다. 계약 당시 낸 월세 한 달 치 정도의 보증금에서 그 비용을 빼고 돌려준다. 집을 험하게 써서 복원 비용이 많이 들면 더 내야 한다. 시비가 오갈 수 있어 전문업자가 같이 점검하고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
세입자도 조심해서 살게 되니 오래 집을 빌려주어도 집수리 할 일이 많지 않다. “전세 놓으면 세입자가 집 다 망쳐놓는다”며 그냥 집을 비워두겠다고 말하는 사람마저 나오는 한국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집 빌려 주고 빌려 사는 한국 문화에 바뀔 게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김범수 문화부 차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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