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봄이다. 유난히도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난 터라 햇볕과 바람에서 감촉되는 따뜻한 기운이 어리둥절할 만큼 낯설다. 봄이란 이런 거였나. 공기가 생물처럼 나를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어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 오랜만인지 처음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벌써 반소매다. 뻗치는 생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들 정수리에서 싹을 툭툭 틔울 것만 같다. 몇 명은 제각각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두 손을 입에 모아 개구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낄낄거린다. 개굴개굴 꽥꽥. 내 소리가 더 커. 그건 개구리가 아니라 오리 소리야. 아냐. 맹꽁이야. 벤치를 떠나며 나도 그 애들처럼 소리를 내본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난다.
집에 돌아와서는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얇은 볼륨인데도 실로 제본이 된 책. 풀칠 대신 실로 꿰매어 엮은 탓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갓 구워진 빵 껍질 같은 바삭한 소리가 난다. 고소하고 간지럽다. 펼쳐진 페이지를, 읽는 대신 만져본다. 햇살을 받아 펼프의 미세한 결이 그대로 도드라져 있다. 하얀 종이가 그저 공백이 아니라 물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바삭한 소리와 종이의 질감에 사로잡혀 좀체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탁기의 종료 벨이 울린다.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고 빨래를 넌다. 바지가랑이가 개다리춤을 추는 것처럼 바람에 흔들린다. 내일 아침에는 저 바지를 입고 외출을 해야겠다. 봄이니까.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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