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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말 못 튼 아들에겐 혁명 길잡이 아닌 모자간 대화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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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말 못 튼 아들에겐 혁명 길잡이 아닌 모자간 대화 지침서

입력
2013.03.0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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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종종 지각을 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라 차가 막혔다는 변명은 통할 리 없었다. 다그치는 선생에게 한마디도 못했다. 맞기도, 욕을 먹기도 했다. 다 엄마 때문인데.

"준비물(또는 참고서) 살 돈 줘요." 어머니는 또 "에고, 그걸 이제 말하니" 하곤 아침 댓바람에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갔다. 등교 시간은 다가오는데 어머니는 함흥차사. 옆집은 얼마 전 손을 벌렸으니 다른 집에 돈 꾸러 간 모양이다.

당신의 창피함을 감추려는 해맑은 웃음이 늘 짜증을 불렀다. "또 학교 늦었잖아." 어머니 손에 깃든 꼬깃꼬깃 지폐를 낚아채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미안해."(어머니) "됐어!" 어머니가 늦게 와서 화가 난 건지, 늘 돈이 없는 집구석이 마땅치 않았는지 가물가물하다. 그까짓 준비물쯤 대수냐고 할걸 하고 후회하지만 이제 늦었다.

어머니는 삼형제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사람 좋은 아버지가 동료들 술값을 대느라 가계는 늘 쪼들렸고, 망할 놈의 돈은 가끔 부부 금슬도 찢어놓았다. 하필 가랑이가 찢어진 분홍 내의를 태연스레 입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부리면 "나중에 너 취직하면 좋은 걸로 하나 사줘" 하곤 웃었다.

사실 가난보다 어머니의 웃음이 더 미웠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갈수록 불편해지더니 사춘기를 겪으면서 모자(母子)간 대화도 거의 끊겼다. "돈 달라" "밥 달라" 무심한 요구가 전부였다.

대학 진학으로 상경한 뒤 친척집에 빌붙었다. 사촌이 쓰는 방 침대 아래가 내 잠자리이자, 독서실이었다. 당시 또래가 그렇듯 사회과학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자연스레 막심 고리끼의 를 만났다.

2차 러시아혁명(1917년)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쓰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답게 가난하고 순박한 한 평범한 어머니(닐로브나)의 의식화 과정을 따분할 만큼 세세하게 전개해 나간다. 아마 읽을 당시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투사로 변해가는 어머니와 용기 있는 혁명가 아들(빠벨)의 모습에 전율도 느꼈으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 더 깊이 가슴에 새겨진 건 소설 속 모자가 주고받는 대화의 강도와 깊이였다. 예컨대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가요? 어머닌 벌써 마흔이에요. 그런데 과연 어머닌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 "어머닌 도대체 자그마한 기쁨이라도 느끼며 살아보셨어요?" 등 이야기 초반 빠벨이 닐로브나에게 던지는 질문들과 차차 말수가 늘어나는 닐로브나의 변화는 나름의 깨달음을 안겼다.

그 뒤 현실의 어머니와 대화를 시도했다. '혁명을 하려면 먼저 어머니부터 변화시켜야 해'라는 가당치 않은 생각도 했을 터. 어쨌든 당신의 꿈과 아버지와의 연애 같은 어머니의 기억이 아들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겼다. 는 내게 혁명 길잡이가 아닌 모자간 대화 지침서였던 셈이다. 공교롭게도 소설의 한 장면처럼 어머니는 학생운동을 하다 붙잡혀 법정에 선 아들에게 선고가 내려지는 장면도 지켜봤다. 그날 어머니는 말없이 울었다.

모자가 말을 트고 지낸 몇 해 뒤 외환위기가 왔다. 어머니는 해고 통보를 받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가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마트에서 일했던 어머니는 요즘 식으로 따지면 불법 파견노동자였고, 아들은 취업준비에 허덕이는 대학생이었다. 해고의 부당성을 가늠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날 자정 전화를 건 동생은 딱 두 마디를 하고 울었다. "엄마, 죽었다." 말문이 막혔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지방의 어느 영안실에서 발가벗은 어머니의 하얀 몸도 끝내 어루만지지 못했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입대한 막내에게 보내는 편지의 초고를 발견했다. "별 일 없재? 엄마랑 아빠도 잘 있어야." 사투리까지 풀어 쓴 문장에 픽 새나온 웃음은 목이 메는 통곡으로 변했다.

어머니와 대화가 없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딱딱하고 가끔은 지루한 혁명까지 논하는 아들도 있는데, 하물며 그대는 무슨 얘긴들 어머니와 나누지 못 하랴. 미루면 늦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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