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권은 지난 2,000년 동안 이탈리아와 유럽에 들어선 정권의 흥망성쇠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 왔다. 초기 교회 300여년을 제외하고 교황이 세속 정치와 동떨어져 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절대권력의 긴밀한 동반자였고, 스스로 무소불위 절대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된 경우도 있다.
교황이 세속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로마제국 말기부터다.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교황에게 거처(라테란궁)를 기증하는 등 특권을 제공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 제국 지배권을 교황에게 넘겼다는 문건(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이 8세기 중반 등장해 교황권 우위를 강조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란 말에서 보듯 중세는 교황권의 절정기였다. 황제를 무릎 꿇리고(1077년 카노사의 굴욕), 성지 탈환을 위해 여덟 차레나 범 기독교 연합 군대를 동원(11~13세기 십자군 원정)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교황령을 직접 통치하는 군주이기도 했다.
이렇게 세속군주 위에 군림했던 누리던 교황 권력은 13세기말부터 서서히 쇠퇴를 겪었다. 14세기 교황은 프랑스에 볼모 신세로 잡혔고(아비뇽 유수), 아비뇽과 로마에 제각기 두 명의 교황이 즉위(대분열)했다. 종교개혁으로 기독교도의 절반(신교)을 잃었다. 1798년 나폴레옹 침공 때 교황이 프랑스에 포로로 끌려가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교황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군대에 로마를 함락당하면서 영토를 완전히 잃는다. 8세기 프랑크 왕국의 피핀이 교황령을 바친 뒤 1,100년간 유지하던 세속 지배권을 상실한 것이다. 교황은 이탈리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를 자처하며 은둔했다. 비오 9세(1846~1878 재위)는 로마를 떠나 독일로 교황청을 이전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불편한 관계가 회복된 것은 1929년의 일이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파시스트 정권과 라테란 협정을 맺으며 59년간 상실했던 세속 지배권을 되찾았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바티칸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대신 교황의 승인을 얻어 파시스트 지배 체제를 공고히 했고, 교황은 주권 국가의 지위를 얻으며 교회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속 지배권을 0.44㎢ 면적(바티칸시국)에 국한하면서 신도 12억명의 세계 최대 종교 수장 권한을 행사하는 현재의 비대칭적 교황 권력이 갖춰진 계기가 바로 라테란 협정이다.
이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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