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인간의 성장이 곧 죽음을 향한 행진이듯, 연애도 그 관계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쇠락의 길을 걷는다. 오래도록 지속되는 아름다운 사랑이란 연애의 생성기에 갖게 되는 허망한 편견일 뿐, 모든 연애의 끝은 지루하거나 추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불륜은 이 연애의 참담한 운명이 극적으로 축약된 형태다.
담당 편집자 아베 세이지와 7년 간의 연애(혹은 불륜)를 파국으로 끝낸 40대 여성 소설가 스즈키 다마키는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있다. 주제는 연애에서 일어나는 ‘말살’이다. 여기서 말살이란 ‘무시하고, 방치하고, 도망쳐 자취를 감추는 등등 제 처지만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끊어 상대방 마음을 죽이는 것’(10쪽)을 말한다. 소설은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들이 사랑의 시체를 앞에 놓고 각자의 방식으로 쓰는 ‘연애의 부고’를 소설 속 소설쓰기라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이 처절한 연애소설의 저자는 뜻밖에도 미야베 미유키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기리노 나쓰오. 독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작가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나는 더 이상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다.” 책 표지에 관련 문구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는 작가는 낭자한 유혈과 잔인한 범행현장을 집요하게 그려내던 솜씨로 폭풍 같은 사랑이 휩쓸고 지나간 뒤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은 황량하고도 스산한 심리를 섬뜩하게 묘파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세이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다마키는 장례식에는 참석할 수 없지만 조의금은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얼마를 내야 할까 고민한다. 그러다 문득 ‘내가 먼저 죽고 세이지가 남았다면 세이지는 조의금을 얼마나 보낼까?’(371쪽) 생각한다. 바쁘게 문장들을 좇던 눈길이 절로 허공을 향한다. 일본인 최초로 미국 에드거 앨런 포 상 최종후보에 오른 출세작 과 쌍을 이루는 이 소설 은 그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포문이다.
작가는 연애의 말살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소설화하기 위해 현실의 완벽한 재현이 그대로 작품이 되는 일본 사소설 전통을 빌어온다. 주인공 다마키는 1970년대 미도리카와 미키오라는 유명 소설가가 쓴 사소설 에 마음을 빼앗긴다. 불륜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는 여류 소설가와 혼외정사에 빠진 미키오, 질투에 광란이 돼 식칼을 휘두르는 아내 치요코, 우유부단한 미키오를 옥죄며 가정에 파란을 일으키는 여류 소설가, 이 세 사람이 서로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벌이는 추악한 애정 활극이다. 엄청난 화제를 모은 동시에 도대체 이런 소설을 왜 썼냐는 비난도 쏟아졌던 작품으로 설정돼 있다.
미키오의 아이들까지 실명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감추어진 이는 미키오의 불륜상대 ‘○코’뿐. 다마키는 자기도 모르게 ○코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코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 소설과 실제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다마키가 깨닫는 것은 현실이 허구를 바꾸고, 허구가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소설쓰기란 진실과 대면하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흉중에 품은, 누군가를 향한 말살의 획책일지도 모른다. ‘소설에 영혼을 빼앗긴 자의 현실은 무섭다.’(281쪽)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국가나 공동체에 대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보잘것없는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소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계몽적인 이야기도 싫고, 주인공이 성장하는 이야기도 싫다”는 이 하드보일드 작가의 전향이 독자들에게 옳은 일이었는지 지켜볼 일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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