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세기 유럽 귀족청년들의 교양기행 "대학 보내느니 해외여행이 낫다" 유행계몽사상 전파·유럽 통합에 영향 미쳐괴테·애덤 스미스 등 동행교사들에겐 엘리트 코스로 가는 엄청난 기회로"학자·일반인 두루 볼만한 대중 교양서 내 책이 읽기 어렵다는 어머니 위해 써"
괴테의 , 아담 스미스의 , 에드워드 기번의 의 공통점은? 당시 유행이던 그랜드투어 도중에 쓰거나 구상했던 작품이란 점이다. 그랜드투어는 17~19세기 유럽 청년 귀족들의 조기유학을 말하는데, 영국 최상류층들이 자식을 유럽 대륙으로 보내 외국어, 매너와 외교술, 고급 취향을 배워오게 한데서 시작돼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괴테와 아담 스미스, 에드워드 기번은 귀족 자제들의 여행가이드 겸 가정교사, 일명 '동행교사'로 활동한 '생계형 학자' 였다.
등 서양사 관련 서적을 여러 권 펴냈던 설혜심(48)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당시 여행기 등을 조명한 를 냈다. 7일 연구실에서 만난 설 교수는 "어머니가 '솔직히 네 책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쓴 첫 대중교양서"라고 소개했다. 두 권으로 나눠 시리즈로 내도 될 만한 묵직한 책을 굳이 한 권으로 낸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봤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단다. "어머니께서 숙제 하듯 제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니 충격적이었어요. 말로는 학문의 대중화를 외치면서 제 체면 때문에 겉멋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지 않나 반성했죠."
설 교수가 그랜드투어를 연구하기 시작한 건 2007년 무렵이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권유로 1년에 걸쳐 그랜드투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후 자신감을 얻어 5년여를 더 매달렸다. 설 교수는 "학자들이 이제까지 그랜드투어를 다루지 않은 이유는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차 사료가 부모 자식간에 주고 받은 편지인데, 돈 줄 쥐고 있는 부모한테 '어머니, 저 어제 계집질했습니다'라고 편지 쓰는 아들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과 개인사료의 차이가 크죠."
설 교수는 아담 스미스가 그랜드투어 중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존 로크가 그랜드투어 중 쓴 가계부 등 역사에 남은 유명인들의 각종 사료들을 모아 그랜드투어에 관한 부분을 발췌해 재구성했다. 여행지침서, 신문 등 공식적인 기록을 찾아 1차 사료를 보완했다. 덕분에 그랜드투어의 조연이었던 동행교사들의 생활과 이들이 바꾼 근대 유럽의 사회, 문화사가 생생하게 복원됐다.
그랜드투어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인맥을 쌓는 일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유명인사는 프랑스 시인 볼테르로, 그는 그랜트투어리스트들의 여관주인 노릇을 하며 계몽사상을 전 유럽으로 퍼뜨렸다. 18세기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인 오페라, 회화에서 신고전주의 유행 등도 그랜드투어가 만든 문화현상이다. 설 교수는 "최상류층에서 그랜드투어는 세련된 '애티튜드'를 갖추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었지만, 신분상승을 꿈꾸는 동행교사들에게는 엘리트 코스로 가는 엄청난 기회였다"며 "동행교사로 유럽을 여행한 지식인들이 거대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문화적 동질감을 가지면서 계몽주의가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랜드투어의 핵심은 교육을 테마로 한 최초의 여행 프로그램이란 점이다. 이 배경에는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당시 명문가 부모들은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에 보내느니 차라리 해외여행을 보내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랜드투어가 성행하면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투어 코스'가 형성됐고, 프랑스에는 오늘날 해외 어학원과 비슷한 사설 교육기관인 아카데미도 성행했다. 그랜드투어 역시 각종 폐단이 지적되면서도 유행처럼 번져 나중에는 중산층,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랜드투어를 떠났다.
조기유학이 꼭 필요한 걸까. 서 교수는 "사람마다 결과가 천차만별이라 전체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다"며 "그럼에도 당시 그랜드투어가 유행처럼 번진 이유는 '안 가면 안 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종의 과시적 소비인데, 그랜드투어를 가지 않으면 엘리트로 행세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그게 아이들을 외국으로 가게 한 거예요. 영국 귀족이 그랜드투어갔다가 프랑스어 쓰는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도 조기유학 갔다온 애들이 한국에서 영어 쓰잖아요. 이런 기조가 있는 한, 애들은 나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학자, 일반인이 두루 볼 수 있는 대중교양서'를 목표로 쓴 신작에 대한 어머니의 평은 어떨까. "일단 책 서문에 당신 본인 얘기 나와서 흥분한 상태에요. 제 인터뷰 기사만 나와도 신문 50 부씩 사서 주변에 돌리시거든요. 하하"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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