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약을 학교에다 두고 왔는데, 집으로 좀 갖다 주세요."
경기 A고등학교의 기간제 교사 B씨는 이 같은 교감의 전화를 받고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연구부장이 "재계약하도록 해 주겠다"며 떠넘긴 일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던 B씨는 차로 20분쯤 걸리는 교감의 집에 약을 전달했다. 그는 "기분이 나빴지만 다음해 재계약을 위해서는 부장이나 교감에게 잘 보여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B씨는 재계약을 못했다.
기간제 교사의 수가 급증하면서 정규교육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교장의 심부름이나 온갖 잡무를 떠안는 부당한 대우도 심해지고 있다. 기간제 교사의 채용과 재계약이 전적으로 교장에게 달려있어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기간제 교사들은 딱히 하소연도 못하는 실정이다.
서울 C여고 기간제 교사 D씨는 학교 근처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부장이나 동료 교사들이 술자리가 끝나면 불려 나가 대리 운전을 하기 일쑤였다. 생활지도부에 같이 속한 다른 교사는 담배 심부름을 자주 시켜, D씨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가방 속에 항상 담배를 소지했다.
또 다른 기간제 교사인 경기 E중학교 F씨는 "러시아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 가보고 싶으니 알아 보라"는 황당한 교장 지시까지 따라야 했다. F씨는 술을 싫어하지만 교장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술자리를 같이 했다.
전국 초중고교의 기간제 교사는 2008년 2만458명에서 지난해 3만8,230명으로 최근 5년간 1만8,000여명이나 증가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3학년도 전국 초중고 교사 정원을 2,500명 증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행정안전부가 동결, 부족분을 기간제 교사가 채우고 있다. 교사 수요가 있는데도 미래 학령 인구 감소를 감안해 행안부가 정원을 늘리지 않고 있어 구조적으로 기간제 교사가 양산되고 있다.
하지만 시도교육청은 계약제 교원 운영 지침에 따라 기간제 교사 채용 권한을 학교장에게 주고, 관리감독을 하지 않아 이러한 사태를 방치하고 있다. 기간제 교사들은 계약 연장, 정교사 채용 등을 위해 마음에 부당한 지시라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인근 학교 교장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 기간제 교사를 채용하지 말자며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공유하는 일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간제 교사 하모(29)씨는 "부당한 일이 너무 많아 정당한 대우인지 부당한 대우인지 판단하기 힘들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김민정(31) 전국비정규직기간제교사협의회 공동대표는 "기간제 교사의 고용 불안을 악용해 재계약 권한을 갖고 있는 교장 및 교사들이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시도교육감이 기간제 교사를 선발해 필요한 학교에 충원하는 방법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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