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님, 예루살렘의 별빛 궁륭에서 다시 한번 광휘를 내려주소서. 보소서. 그대를 추도하는 우리의 눈물 넘쳐 흐르나이다.” 어느새 트랙이 넘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독일어 가사를 들으며 구구절절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 어용가사는 뭐지? 바흐의 칸타타BWV198번이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칸타타BWV106번을 들으려고 구입한 음반 뒷부분에 이 198번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독일 라이프치히 유학 시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씨는 내가 살던 요하네스 플랏츠로부터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다. 성 토마스 교회의 일요일 아침 예배에서는 거의 매주 성 토마스 합창단이 연주하는 바흐의 칸타타가 울려 퍼졌다. 그 음악은 정신의 양식처럼 도시의 건물 외벽과 바닥 돌 틈에 스며들었다가, 들리지 않는 소리로 늘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교회력에 따라 예배에서 연주할 칸타타를 매주 작곡하는 일은 라이프치히 시절 바흐씨의 주요 임무이자 고된 일상이었다.
이런 본업 외에 간혹 특별한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특히 고위인사들의 장례음악이나 추도곡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많았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라, 작곡과 리허설은 빠듯하게 이루어졌다. 칸타타198번은 작센의 공비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를 애도하는 송가였다. 뻔뻔하고 바람기 많은 남편 아우구스트 공은 종교도 결혼의 신의도 모두 저버렸으니 이 경건한 공비의 결혼생활은 속수무책 불행했다. 그럼에도 프로테스탄트로서 흔들림 없었던 이 여인은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가사가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그녀는 진실로 ‘위대한 여인의 표상, 숭고한 여왕, 믿음의 수호자’이긴 했던 것이다. 고트셰트가 쓴 진부한 텍스트는 칸타타 가사로서의 형식에도 벗어나 있어서, 바빴던 바흐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가사에 마구 손을 댔다.
큰 살림을 꾸린 가장 바흐씨의 어깨에는 짐이 많았다. 우리의 바흐씨는 개중 직책은 높았지만 기본적으로 궁정 시절에는 하인이었고, 라이프치히 시절에도 피고용인이어서 음악과 무관한 임무에도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창조력을 결박하는 갑갑한 구속에 분개하여 프리랜서를 표방했던 모차르트는 반세기 후에나 등장한다. 그러나 이 때이른 반란을 수용하기에는 아직도 시장의 여건이 무르익지 않아서 모차르트는 불우한 말년을 보낸다. 바흐의 시대만 해도 예속된 자리에 순응하는 상근직을 얻지 못하면 음악가가 생계를 영위할 수 없었다.
바흐씨의 창작에는 세 가지 동력이 있었다. 고정수입이 들어오는 본업, 부수입이 들어오는 클라이언트 작업, 금전적 보상 없이 스스로 행하는 작업. 매주 작곡한 교회 칸타타는 본업이었고, 장례음악 등의 주문은 비정기적인 부수입이었다. 그래서 장례식이 적었던 해에는 바흐의 총수입이 현저히 줄어들기도 했다. 출판 수입을 내심 바라긴 했지만, 순전히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의지와 탐구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곡을 쓴 경우도 있었다. 생애 말년의 대작 ‘푸가의 기법’이 그 예이다.
생각해보니, 나를 비롯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창작 활동 역시 이 세 가지 원천을 동력 삼아 이루어진다. 본업이 있고, 클라이언트 작업이 들어오고, 여기서 번 수입으로 자비를 들이거나 후원을 받아 자발적인 예술 의지를 실천하기도 한다. 포트폴리오형 작업과 이름조차 걸지 않는 생계형 작업을 아예 분리시키는 디자이너도 있다. 디자인도 땅파먹고 하는 일이 아닌지라,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마찰을 빚고 서로 뒷목 잡는 일도 드물지 않다.
칸타타 106번과 198번은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죽음을 묵상하는 106번은 영혼을 정화하는 명상적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반면, 198번이 주는 위안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다. 내키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그저 이 곡의 존재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된다. 198번에는 묵묵히 불평 없이 맡은 일을 솜씨 있게 수행해낸 바흐씨의 모습이 담겨있다. 음악의 아버님, 사는 거 고되시죠?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저술가·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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