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의 현대자동차 공장. 4,000여명의 근로자들이 쏘나타와 그랜저를 연 30만대(하루 1,100여대)씩 생산하는 곳이다.
5일 오후 점심시간이 끝났을 무렵 정문에 들어서자 공장은 조용했다. 대부분 근로자들이 실내 작업중인 탓이었다. 하지만 오후 3시30분이 지나자 10여개 공장문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일 때 사람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풍경은 1993년 공장이 생긴 이래 처음"이라고 공장 관계자가 설명했다. 지난 4일부터 밤샘근무가 폐지되면서 생긴 새 풍속도이다.
현대차는 창사 이래 밤샘근무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주야 맞교대 근무형태 때문이었다. 하지만 10여년에 걸친 노사협의 끝에 주야 맞교대가 주간 2교대로 전환되면서, 46년만에 밤샘근무는 사라지게 됐다.
96년 입사해 17년째 생산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황기연(46)씨는 "이제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밤샘근무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절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아침 6시20분에 출근해 오후 3시30분 일을 마친 황씨는 귀가 후 오후 5시쯤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리는 막내아들(4)을 집 앞에서 맞았다. 아이 마중은 처음이라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야근하고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이라며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불과 지난 주까지만 하더라도 황씨는 아이들(2남 1녀)에게 '회사 갔다 와서 잠만 자는 사람'으로 통했다. 주중 일상은 철저하게 아이들과 엇갈렸고, 주말 또한 특근 탓에 빗나갔다. 그는 "그러다 보니 게임 하는 큰아들(17)에게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아빠가 언제 관심 가진 적 있느냐'는 타박을 거꾸로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저녁모임에 나갈 수가 없으니,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선 '왕따 아닌 왕따'가 됐고, 형제나 친척간 우애도 엷어졌다. 이날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그는 "청소 하고 책도 보고 야구경기까지 봤다. 저녁시간이 이렇게 소중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모처럼 잠도 푹 잤다고 했다. 그는 "밤샘근무를 하고 낮에 잠을 자면 윗집, 단지내 놀이터, 학교서 돌아온 아이들 소리에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면서 "몸이 축나는 건 당연했다"고 말했다.
위궤양, 우울증, 심근경색, 암 발병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밤샘근무의 폐해는 익히 알려진 사실. 황씨는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지 않느냐. 근무형태 변화는 아마도 17년 직장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남들 잘 때 같이 자는 게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한다.
사실 밤샘근무 폐지는 회사로선 부담요소였다. 기존 '10+10시간'의 주야 맞교대 체제가 '8+9시간' 주간 2교대로 바뀌면 일단 공장의 절대가동시간이 하루 1.5시간, 연간 236시간 줄어든다. 근로자 입장에선 노동시간단축과 근무환경개선이지만, 회사로선 공장가동시간단축과 생산량 감축요인이 된다.
그렇다고 생산대수를 줄이거나 인건비를 깎을 수는 없는 일. 노사 양측은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생산량 감소는 투자확대 및 효율개선으로 메우기로 했다. 아산공장의 경우 근로효율개선을 통해 시간당 생산대수를 종전 63대에서 66대로 늘림으로써, 생산공백을 메우고 있다.
낡은 밤샘근무 철폐가 결국은 근로자와 회사 모두에게 '윈-윈'이 될 것이란 게 이곳 분위기다. 아산공장 총무팀 오영환 부장은 "무료영화 상영, 골프연습장 확대, 인근 레저시설 이용 등 근로자들의 여가활동지원을 위한 방안도 모색 중"이라며 "근로자들의 삶의 질이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산=글ㆍ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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