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세상에 나온 한국 단편소설 중엔 아버지가 기린으로 변해버리고 만다는, 조금 황당한 내용의 이야기가 한 편 있다. 사람이 기린으로 바뀐다니, 말도 안 되는 편집증 환자의 헛소리 같지만, 차근차근 소설을 따라 읽다 보면 절로 고개도 끄덕거려지게 되고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기까지 한다. 어쨌든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란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이고, 손동작 하나마저도 슬프고 느린, 성격이 곧 신체 사이즈가 되어버린, 기린을 닮아 있으니까. 소설은 그렇게 현실을 알레고리화하면서, 다시 현실에 대해서 발언한다. 그래서 이때의 편집증이란 위장된 편집증, 현실을 끊임없이 참조하는 편집증으로 작동한다.
작금의 한국소설엔 비단 아버지가 기린이 된다는 설정 말고도, 모자로 변해버린 사람 이야기, 외계인 때문에 피폐해진 농촌 이야기, 어마어마한 의처증을 가진 남자 이야기 등등, 수없이 다양한 임상학적 편집증 사례들이 돌고래떼처럼 출몰하고 있다. 본디 소설이란 장르가 '타락한 세계를 타락한 방식'으로 그리는 글쓰기인 건 맞지만, 그것은 또한 그만큼 우리 시대 자체가 편집증적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론 얼마 전이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있다고 여기는 한 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나이가 조금 든 늦깎이 남자 대학생이었는데, 동기들과 눈만 마주쳐도 '쟨, 왜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생각하고, 누군가 슬쩍 농담을 건네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를 비웃지? 필시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어'라고 지레짐작하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지옥을 지었다가 부수고, 다시 만들었다가 해체하기를 반복하는 친구였다. 한 번은 그 학생이 나를 찾아와 '지난번에 선생님이 발표한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 P가, 저를 모델로 쓴 것이 아니냐? 왜 그렇게 저를 싫어하시냐?' 하면서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물론 P는 그 친구를 모델로 만든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럴 때 그 학생에게 '너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세상을 좀 더 넓게 봐야지' 따위의 당위를 강요하는 건 사태를 해결하긴커녕,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데 일조할 뿐이다(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학생상담매뉴얼'이 가르쳐준 사실이다). 조금 힘이 들고 시간이 들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래서 문제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가 조금씩 조금씩 알아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낸시랭'이라는 팝아티스트를 '종북좌파'로 몰아세운 한 친구 때문에 요 며칠 인터넷이 시끄러웠다. 그 친구의 '광의의 종북 개념'에 따르면, 그 친구가 '종북'이라고 일컫는 세력과 친분을 유지하거나, 그들의 희망이 되기만 해도, 그는 저절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종북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광의의 개념'에 따르자면,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올라간 고라니도, 이름 모를 좌파가 좋아한 기린도, 언제 어느 때 '종북좌파'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라니와 기린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그의 '광의의 개념'이다.
그렇다고 그 친구와 그 점에 대해서 어떤 논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당위를 주장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건 그 친구 개인의 문제라기 보단 시대의 한 징후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조건 '종북'이라고 낙인찍어야지만 안전하다고 믿는 시대, 그래야 '애국'이라고 믿는 사람들, 우리는 지금 그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편집증은 대개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발생하곤 한다. 자기방어적 성격을 띠기도 하고, 권력이나 권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편집증적 서사에 기반한 소설들은 대개 그들의 상처에 주목한다. 문제 해결은 어쨌든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상처를 들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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