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씨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인지는 예상치 못했다. 이런 사람이 박근혜 정부의 핵심 부서인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장관이 되려는 사람이'야당과 정치권의 난맥상'을 후보자 사퇴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모습에는 황당함과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김씨가 공직자가 될 자세와 준비가 돼있었는지, 오랜 기간 미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경험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장관 후보자로 발탁된 이후 보름 넘게 여야의 정부조직 개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대통령이 인사청문회 요청조차 못한 상황이 답답했을 것이다. '조국에 헌신'하려고 미국 국적까지 포기하려 한 마당(실제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에 화가 났을 법도 하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입지전적 성공을 거둔 자신을 깎아내리는 시선에 울분을 삭인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가 되어 대한민국과 국민의 미래를 위해 진정 헌신하기로 했다면 그런 일들은 견뎌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직자가 되려는 이에게 개인의 명예, 자존심 같은 것들이 조국, 국민, 헌신, 봉사보다 더 높은 가치일 수는 없다. 그것은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한 국가에 속한 사실 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김씨가 강조한 조국은 정말 어디이며, 조국에 대한 헌신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면 없다가도 생기고 변하기도 하며, 기분 나쁘면 언제든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인가. 조국에 대한 헌신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조국에 대한 헌신을 접겠다"는 말과 낮도깨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정부조직 개편을 둘러싼 여야 대립,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영수회담의 무산 등 정치 현실에 대한 좌절을 사퇴의 이유로 들었지만 그야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다. 김씨의 삶의 터전인 미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최근 오바마 2기 행정부의 첫 안보수장에 오른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대통령 지명 후 50여 일이 지나서야 연방 상원의 인준을 받았다. 그의 자격을 문제 삼아 두 달 간 임명에 제동을 건 것은 헤이글 장관이 몸담았던 공화당 소속 동료 의원들이었다. 이로 인해 오바마 대통령은 각료회의를 취임 6주 만에야 열 수 있었다. 어디 헤이글 장관뿐인가. 의회 인준에 발목이 잡혀 제 때 취임하지 못했던 미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지금껏 미국에서 정당 간 대립을 이유로 조국에 대한 헌신 포기 운운하며 후보자 지위를 걷어찬 사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미국에서 정치권의 정쟁 장면을 숱하게 목도했을 김씨가 유독 한국 정치인들의 대립만 생소하고 충격적인 일인 양 사퇴의 이유로 삼으니 기가 막히는 것이다.
차라리 미 중앙정보국(CIA)과의 유착 의혹, 엄청난 액수의 국적 포기세 부담, 막대한 재산 관련 문제 등으로 인사청문회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면 그 진솔함에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인사청문회를 보고 나서 공직 진출을 강하게 반대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면 동정이라도 샀을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번지수를 벗어나 한창 정부조직법 개정 협상 중인 국회를 겨냥하는 우를 범했다.'조국에 대한 헌신을 접는다'는, 일반 국민들조차 함부로 쓰지 않는 말로 국민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해서 어물쩍 넘길 일이 아니다. 김씨는 이 가당치 않은 발언에 대해 분명히 해명하고 책임져야 한다.
애당초 이중국적, CIA와의 유착 의혹 등은 김씨의 장관으로서의 자질과 적격 여부를 따지는 데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인식과 삶을 지배해온 정체성, 공직자로서의 자세와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 공직관이었다. 그가 사퇴의 변을 통해 국민들이 알고 싶어했던 정체성과 공직관을 미리 털어 놓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앞으로 국내에서 고위 공직을 맡거나 맡을 의향이 있는 해외 인재들이라면 김씨 케이스를 반면교사로 삼기 바란다. 일국의 장관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는 결코 아니다.
황상진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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