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식구의 가장 한모(67)씨에게 집은 스위트 홈(Sweet Home)이 아니라 스트레스 덩어리다. 그는 1995년 경기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목련2단지 아파트에 입주했다. 200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집과 관련된 소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지뢰밭이다.
주차문제, 화장실, 녹물, 난방 낭비 등 낡은 아파트가 안겨다 준 생활의 불편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씨는 "여름이면 서너 번 이상 전기가 끊겨 에어컨을 못 쓰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아찔한 사고도 발생한다"고 전했다.
한씨뿐 아니다. "녹물이 많이 나와 집에서 씻을 수가 없다"(일산 이모씨), "벽에 금이 가고 물이 새서 몇 번이나 고쳤는데 또 그런다"(산본 김모씨) 등 비슷한 증언이 잇따른다.
이들이 사는 지역은 정부가 집값 안정, 주택난 해소를 위해 1990년대 초반 건설한 수도권 1기 신도시(고양 일산, 성남 분당, 부천 중동, 안양 평촌, 군포 산본)다. 계획적으로 개발된 대규모 주거지,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에 한때 '부동산 노다지'라 불렸지만 입주 20~22년이 넘어서면서 헌 도시로 전락하고 있다.
주민들은 "수직증축을 통한 리모델딩이 살 길"이라고 외치지만, 정부는 안전 문제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주민들 간에도 의견이 갈린다. 부동산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주택 재정비가 필요한 신도시 30만 가구의 불편도 깊어지고 있다.
2005년 분당 아파트에 입주한 김모(40)씨의 고단한 하루는 신도시 주민들이 처한 집에 대한 짜증과 생활의 불편을 에누리 없이 대변한다.
김씨네는 일어나면 밥 짓는 일부터 고역이다. 녹물 탓에 생수를 몇 박스씩 쌓아놓고 쓰던 게 힘들어 6개월 전 정수기를 샀지만 물 받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다. 화장실이 1개라 아침이면 김씨와 부인(40), 딸(9)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져 출근이 늦어지곤 한다. 수납공간이 부족해 거실과 베란다가 창고 같다. 3주 전 이웃 동에선 복도 창을 뜯고 침입한 도둑이 귀중품을 모두 털어가기도 했다. 출근 길 복도에 난 창으로 딸 방이 보일 때마다 불안하다.
전날 운 좋게 차를 주차장에 세웠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대당 주차공간이 좁아 차를 빼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일렬로 늘어선 이중주차 차량들을 밀다가 빙판길에 넘어진 적도 있다. 차 곳곳에 긁힌 자국이 있지만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라 "에잇" 하고 만다. 폐쇄회로(CC)TV가 없어 누가 그랬는지도 알 수 없다. 빽빽이 들어찬 차량들을 피해 사이드 미러까지 접고 단지를 빠져나가느라 식은땀이 돋는다.
퇴근이 다가오면 짜증부터 밀려온다. 야근으로 밤 11시 이후에 귀가하면 주차공간이 아예 없다. 부아를 누르고 단지 주차장을 서너 번(15분 소요) 돌다가 간신히 자리를 잡으면 그나마 한숨을 돌린다. 어떤 날은 30분 이상 헤매다 집과 300m 이상 떨어진 도로변에 세우기도 한다. 그럴 때면 집에 걸어갈 걱정은 둘째고 행여 단속에 걸릴까 봐 다음날 출근 전까지 신경이 곤두선다. 이미 주차위반 딱지를 여러 번 끊었지만 어쩔 수 없다.
집 문을 열면 냉기가 싸하다. 15년 전 지은 건물이라 열효율이 낮아 온도를 아무리 높여도 난방비만 더 들고 따뜻하지 않다. 온 가족이 안방에 모여 옷을 겹겹이 입고 전기장판을 깔고 자는데도 월 난방비가 30만원을 훌쩍 넘는다.
샤워는 1분 정도 물을 틀어보고 붉은 색(녹물)이 안 보인다 싶으면 한다. 그나마 수압이 약해 비누칠을 한 뒤 물이 안 나와 한참을 벌벌 떨기 일쑤다. 녹물 빨래로 흰옷이 빨갛게 물들면 부아가 치밀지만 버리는 수밖에 없다.
자려고 누웠더니 천장이 누렇게 들떠있다. 지난해 여름 장마 때 누수가 생겨 30만원 들여 도배를 했는데 또 저 모양이다. 베란다엔 결로 탓에 페인트가 떨어지고 곰팡이가 슬었다. 놀이터가 낡고 CCTV도 없어 아이들은 대개 집에서 논다. 그래서 층간 소음도 골치다. 아내가 "이사 가자"고 할 때마다 치미는 스트레스를 꾹 누른다. 집이 원수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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