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로펌으로 갓 옮긴 고위 법조인들은 한 달에 수천만~수억원의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이 같은 보수에는 고위 법조인 출신이라는 명예와 체면을 버려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돼 있다. 법원, 검찰 내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이른바 '갑'에서 '을'의 자세로 바뀌는 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대형 로펌의 경우 전관이 입사하면 가장 먼저 "현직 때처럼 판단하려 들지 말고 어떻게 하면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지 고민하라"는 취지의 실무교육을 실시한다. 로펌의 선배 전관 변호사가 신입 전관을 상대로 가장 자주 하는 말도 "판ㆍ검사 물이 빠져야 실적이 나온다"는 경험 섞인 조언이다.
교육이 끝나면 고위직 출신 변호사들은 후배들이 근무하는 법원이나 검찰청으로 향한다. 직접 방에 찾아가 안부를 묻는 방법으로 은연 중에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일부 판사들은 직원에게 "어떤 변호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해 두는 경우도 있지만, 전관의 방문을 원천봉쇄하기는 힘들다. 한 법원 여직원은 "변호사와 안 만난다고 말해도 30분 넘게 방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도 있다"며 "그렇게 며칠씩 찾아오면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품위를 강조하는 법원 고위직도 전관이 되면 180도 자세가 달라진다. 후배 교육에 엄격해 '호랑이 법원장'으로 불리던 A변호사의 변신이 그런 경우다. 대형 로펌에 영입된 후 그가 수도권 법원의 후배 판사 방을 일일이 돌면서 90도로 인사하고 다니더라는 것이다. 한 판사는 "나중에 들으니 A변호사는 '그 법원 판사들은 내가 꽉 잡고 있다'고 과시해 수억원은 벌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피의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영장전담판사들은 전관들의 대표적인 타깃이다. 영장전담으로 일했던 B부장판사는 "피의자의 변호인으로 현직에 있을 때 모셨던 선배들이 선임되면 예외없이 '내가 그거 맡은 거 알지?'라는 전화가 온다"고 말했다.
검찰 고위직도 예외는 아니다. 검사장급 이상 간부 출신 변호사에게는 여간해선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몰리게 마련이다. 이른바 '인공호흡기 단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이다. 전관들이 이런 사건에선 후배 검사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건을 해결해야 성공보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경 지검의 한 검사는 "과거 모셨던 상관이 1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오니 짜증이 날 정도였다"며 "평소 그렇게 강단 있던 검사가 로펌에 들어간 뒤 하는 행동을 보고 안쓰럽기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1년 남짓한 전관예우 기간이 지나면 고액 연봉은 뒷자리의 '0' 하나가 빠질 정도로 쑥쑥 내려간다. 시간에 쫓기는 전관 변호사에게 명예와 체면은 뒷전이기 마련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후배 법조인들의 시선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전관예우 자체보다 존경할 선배들이 없어지는 것이 더 문제"라며 "본받고 싶은 롤 모델이 없어지면 그 집단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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