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1기 신도시 복덕방 주인들은 흥정을 붙여도 모자랄 판에 싸움을 말리는 게 일이다. 겉만 멀쩡하고 속은 썩은 아파트들 탓이다. 분당신도시 공인중개사 유모(41)씨는 "전세 계약 10건 중 4건은 수리 문제로 분쟁이 생겨 1, 2건은 사비를 털어 해결한다"고 털어놓았다. 일산신도시 공인중개사 김모(58)씨는 "온갖 잔 고장 탓에 주인과 세입자 절반 가까이는 서로 얼굴을 붉히지만 집들이 워낙 낡아 뾰족한 수도 없다"고 했다.
평촌(안양), 중동(부천), 산본(군포) 등 다른 1기 신도시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분쟁의 원인은 수도꼭지와 빨래건조대 부식, 현관문 열쇠 고장, 잘 안 눌리는 벨 등 자질구레한 부분부터 배관 고장, 균열, 주차대란, 난방 및 전력효율 저하 등 큰 공사나 근본적인 구조변경이 필요한 것까지 다양하다.
한때 '명품 주거단지'로 불리던 1기 신도시가 차츰 헌 도시가 돼가고 있다. 아파트가 오래되면 노후화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러나 1기 신도시는 1989년 정부가 작심하고 선보인 현대식 주거단지로 부동산시장의 활황을 누구보다 만끽한 지역인만큼 상실감도 크다.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수식어로 상징되던 옛 영화는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주민들의 호소로 바뀌고 있다. 그나마 유일한 해법으로 거론되던 리모델링 사업조차 부동산경기 침체, 법적 제한, 주민 간 이견, 2기 신도시와 보금자리 공급에 따른 경쟁자 등장 등으로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다.
1기 신도시의 명암은 시세 추이에 그대로 묻어난다. 4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1기 신도시의 최근 아파트 매매가격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거품이 빠지기 직전인 2007년에 비해 분당 -37.35%, 일산 -31.39%, 평촌 -26.42%, 산본 -13.93%, 중동 -3.64% 등으로 급락했다.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변동률(-6%대)과 비교하면 하락폭이 최대 6배나 된다.
부동산 활황 시기에 버블로 불릴 정도로 훌쩍 뛰었던 만큼 침체기 하락폭도 컸다는 얘기다. 그나마 거래도 없다. 1기 신도시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올해 3억8,726만원으로 떨어져 2007년 이후 처음 4억원을 밑돌았다. 물론 전셋값은 최근 6년간 30%대 상승했다. 서울과 가까운 입지 조건, 편리한 생활환경 등 아직은 살만한 지역인 덕분이다. 그러나 막상 전세를 얻어 들어가면 이런저런 불편 탓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주민들은 재건축 연한(40년)이 모자라 리모델링만 바라보고 있지만 곳곳이 암초다. 우선 사업성을 높일 수 있는 수직증축은 법적으로 막혀있다. 1기 신도시 조합들이 연합회를 꾸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수직증축을 허용해 달라는 탄원서까지 냈지만 아직 답이 없다. 국토해양부는 건물 구조의 안전 문제를 들어 불가 입장이다.
소형과 대형평형 주민간 이해관계도 다르다. 2007년 부동산경기가 한창 좋을 때 무르익던 리모델링 논의가 어그러진 것도 소형평형 주인들은 리모델링을 원한 반면, 대형평형은 추가 부담을 우려해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후 부동산경기가 꺾이면서 논의조차 흐지부지됐다.
아직 리모델링에 목을 매는 축은 주로 소형평형 소유자들이다. 이형욱 1기 신도시 리모델링 연합회장은 "재건축을 하면 살던 사람이 떠나지만 리모델딩은 다시 돌아오는 사업인 만큼 수직증축 허용, 용적률 제한 완화 등 리모델딩을 장려하는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9년 5개 신도시 60~70개 단지가 모여 설립한 이 단체엔 현재 15개 단지가 남아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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