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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품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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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품앗이

입력
2013.03.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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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서는 관장이지만 집에서는 주방을 관장하는 주부이니, 매끼니 먹거리며 음식 만들기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결혼 전까지 바지런하고 음식 잘하는 친정 엄마 밑에서 손은 게으르고 입은 까다로워진데다, 요리학원 같은 데서 따로 배운 바도 없어 어찌어찌 근근이 주부노릇을 해나가는 중이다.

뒤늦게나마 친정집을 오가며 배워볼까 생각도 해보고, 요리학원 등록을 궁리해본적도 있다. 요새는 요리학원보다 요리연구가가 자신의 집에서 소규모의 인원을 대상으로, 한 요리 당 일정 비용을 받고 진행하는 요리강좌가 인기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가정집 주방에서 하니 실생활에서의 응용도가 높고 소규모라 학습효율이 높다는데. 동네 지인 중에 종로구에서 강 건너 압구정동까지 요리연구가의 아파트로 요리를 배우러 다니는 이도 있다. 하지만 비용도 만만찮고 따로 시간을 내서 강남까지 다리를 넘어가는 일이, 또 요리연구가라고 하나 낯모르는 이의 살림집을 내방하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산초장아찌를 좀 맛보라며 가져왔는데, 향긋한 것이 보통 맛이 좋은 게 아니었다. 직접 산초열매를 따서 담았다 했다. 아주머니는 “난 딴 음식은 못하는데, 이거 하난 기막히게 담근다고 친구들이 다 내가 산초장아찌 담그길 기다린다”고 했다. 그 말이 톡 쏘는 산초향과 함께 아이디어를 촉발시킨 것 같다. 누구나 한두 가지씩 자기만 잘하는 뭔가가 있지, 그걸 서로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면 저마다의 살림솜씨가 풍성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침 혼자 인터넷으로 배워 곧잘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먹는 친구가 있기에, 그 친구로부터 두부 만드는 법을 배우자고 동네 친구들을 부추겼다. 재료도 준비하고 만든 음식을 나누어먹으니, 고마움의 표시로 각자 봉투에 만원씩 담아가기로 했다. 그것이 이름 하여 ‘만원요리’의 시작이었다. 수강료로 1만 원을 내서 ‘만원’이요, 사람 몇 만 모여도 주방이 꽉 차서 또 ‘만원’요리다. 인터넷으로 혼자 두부만들기를 배운 친구는 간수를 만들기까지 실패도 겪고 하였다는데, 그날 모인 동네 친구들은 모두가 일시에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각자의 집을 돌아가며 ‘만원요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저녁에 만원요리가 있는 날이면 출근하는 가방에 앞치마와 함께 1만 원 권 지폐 한 장을 예쁜 색지봉투에 담아 넣어둔다.

‘만원요리’ 친구들은 결혼을 늦게 한 초보주부부터,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엄마도 있고, 오랜 외국생활 끝에 돌아온 미혼도 있다. 된장찌개에 통 맛을 낼 줄 모르는 유학파 친구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할 줄 모르는 파스타며 이름이 생소한 향신료 요리들에 능숙하다. 또 세 아이의 엄마는 견과류를 넣은 잔멸치볶음을 얼마나 맛나게 잘하는지. 늦게야 결혼한 학구파 친구는 인터넷으로 뭐든지 배워 두부처럼 쉬이 엄두 못 낼 음식을 한다. 불교신자인 또 다른 친구는 공양주보살로부터 효소 만드는 법을 익혀, 집에 온갖 종류의 효소 항아리가 가득하다. 제사가 많은 맏며느리 친구는 여러 나물무침을 재빠르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 저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다양한 음식들을 잘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동안 반복되는 상차림 앞에 막막할 때면 친정엄마와 통화를 했는데, 그렇게 배워서 맛을 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테이블스푼’이니 ‘밀리리터’ 같은 계량용어가 친정엄마에게는 ‘적당히’ 또는 ‘알맞게’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래인데다 살림 사정도 비슷한 동네 친구끼리 가르치고 배우니 소통이 잘 되었다. 직접 만든 것을 둥글게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먹는 재미도 그만이다. 자연스레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만큼 사이도 더 돈독해졌다. 한 달에 한번 정도지만, 일 년이 지나자 전에 할 줄 모르던 음식 열두 가지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은 물론이다. 식구들도 좋아라 반긴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마음을 근간으로 해서,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루어졌다는 ‘품앗이’의 미덕도 떠오른다. 다만 노동력이 아니라 요리솜씨라는 점이 다를 뿐. 어디 요리만일까? 그것이 소소한 솜씨든 큰 재능이든 가까운 이들과 서로 주고받을 게 없을지, 상상만으로도 풍성해지는 봄의 초입이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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