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를 싫어했다. 주요 정책과 법안 추진과정에서 야당 설득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치 경력보다는 대기업 CEO 경력이 더 많았던 그에겐 정치의 핵심인 대화와 타협은 비능률이거나 좋지 않은 거래로 비쳤을 법하다. 이명박 정부시절 국회에서 유난히 물리적 충돌이 많았고 정국운영도 순탄치 못했던 것은 MB의 여의도 정치 기피 탓이 크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요즘 여의도 정치 기피라는 점에서 MB보다 한술 더 뜨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정부조직법개정안 국회 논의와 여야 협상 과정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민주통합당은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이 협상 여지를 좁히고 있다고 불만이다. 급기야 청와대 대변인이 야당을 상대로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거듭 가졌고, 어제는 박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담화문을 발표하는 박 대통령의 결연하고 단호한 모습은 국민들에게 상당히 어필했을 것이다. 핵심 쟁점인 미래창조과학부 방송정책기능 이관 문제와 관련해 방송장악 음모 주장을 일축하며 “과거의 생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정치논쟁으로 이 문제를 묶어 놓으면 안 될 것”이라고 야당을 정면 겨냥했다. 그 직전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후보자는 “야당과 정치권의 난맥상을 지켜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던 꿈을 접었다”며 자진 사퇴했다. 민주통합당이 대국민 여론전에서 코너에 몰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민주당을 향해 날린 돌직구가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5일 정부조직법개정안 처리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다. 민주당의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오만과 불통의 일방통행”이라고 반발했다. 대국민 담화로 야당을 압박하는 것은 3권 분립 민주주의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날을 세웠다. 그나마 열려있던 여야 협상의 문도 닫혔다.
현재의 여야 의석 구도에서는 여야가 합의하지 않는 한 정부조직개편안을 처리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국회의석 과반을 차지한 여당이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통한 일방처리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지난해 5월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시절 지휘해 통과시킨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여당 일방적 처리가 가능 하려면 전체 의석의 5분 3인 180석 이상을 확보해야 하지만 새누리당 의석은 150석이 조금 넘을 뿐이다. 중요 관문인 국회 법사위의 위원장도 민주통합당이 지키고 있다.
당장은 정부조직법개정안 처리가 발등의 불이지만 앞으로 박 대통령의 주요 공약과 정책을 추진하려면 항상 이런 국회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이번에는 대국민 직접 호소로 어떻게 돌파를 시도해본다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싫든 좋든 야당의 동의를 얻는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정부조직법개정안 협상부터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풀어가는 게 현실적이다. 지금은 이명박정권 때에 비해 야당의 협조 없이 국정을 이끌어가기가 훨씬 더 어렵게 돼 있다.
새누리당의 조해진 의원은 4일 의원총회에서“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동의를 이끌어내고 절충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며 “지금은 통치의 시대는 갔고 정치만 가능한 시대”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옳은 지적이다. 내 뜻이 옳으니 무조건 따라 오라는 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 시절에는 정치가 아닌 통치만으로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물리력과 돈 등 다른 수단이 없는 지금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밖에 달리 선택의 길이 없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정치를 외면하고 있다. 대통령 취임사 어느 곳에도 정치와 국회, 정당에 관한 언급이 없다. 국민을 직접 상대해 야당을 압박해 돌파하겠다는 건 오산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통치 아닌 정치에 눈을 떠야 한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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