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싸울 때 코피가 나면 진다. 코피가 난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게 마련이다. 평소에 피를 볼 일이 그리 많지 않은데 자기 코에서 시벌건 피가 흘러나오면 아픈 건 둘째 치고 일단 겁이 나게 된다.
그런데, 코피를 흘리는 아이가 손에 코피를 묻혀 상대방의 뺨을 때리면 역전승이다. 역전승 정도가 아니라 코피로 뺨을 맞은 녀석은 몸에 독이 올라 병이 들거나 죽게 된다. 과학적 근거는 없는 것 같지만 하여간 어려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코피가 나는데도 울지도 않고 졌다고도 하지 않고 계속 덤비는 녀석과는 절대로 더 싸우면 안 된다.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까맣게 잊었던 옛날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어느 날 밤 술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 세수를 하는데 갑자가 코피가 주르륵 흘렀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만 되면 코가 잘 막힌다. 코 속이 답답해서 세게 코를 풀거나 ‘코 청소’를 자주 해야만 좀 편해진다. 이번에도 겨우내 코가 막혀 답답했었다.
갑자기 코피가 나오자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입에서는? 눈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피가 안 나오나 하고 걱정하게 됐다. 인간의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 이른바 구규(九窺)가 있고 얼굴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묘사하는 글에 ‘칠공(七孔)으로 피를 쏟고’라는 표현이 흔히 등장한다. 에도 관운장의 혼령이 붙은 오(吳)의 여몽이 손권을 향해 욕설을 퍼붓더니 칠공으로 피를 쏟으면서 죽는 대목이 나온다.
의 그 장면이 생각나 괜히 걱정스러워졌다. 어느새 화장실 바닥에도 코피가 묻어 있었다. 가족들 모르게 그걸 열심히 걸레로 닦고 물을 뿌려 지우면서 막힌 걸 억지로 뚫으려 하면 사단이 난다는 걸 다시 알게 됐다. 내 코는 왜 자꾸 구멍을 메우려고 하나? 그것은 내 코의 생존본능일 것이다. 인체의 기능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고 대단하다.
'육혈'이라는 말이 있다. 외상이 없는데도 두부의 모든 구멍 및 살갗에서 피가 나오는 병증을 말한다. 혀에서 나는 피는 '설육', 이에서 나는 피는 '치육'이라고 한다. '육'은 ‘코피 육’자다. 양락(陽絡)이 상하면 혈이 밖으로 넘치고, 혈이 밖으로 넘치면 육혈이 된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이른바 육혈부지, 코피가 한동안 멎지 않아서 몹시 당황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코피가 났으니 겨우내 막히고 답답했던 코가 풀리고 이제 봄이 오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 머리를 깎으러 미장원에 가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또 코피가 터져 나왔다. 전날 산에 다녀와 술을 되게 마셨는데 그 영향인가 싶었다. 창피하고 황당해서 얼른 화장실로 뛰어가 물로 닦아냈지만 또 다시 육혈부지였다.
할 수 없이 미장원에 돌아와 휴지를 달라고 해서 코를 막았다. 탁자에는 코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종업원이 “코피 한 잔 드릴까요?” 하기에 그러라고 했는데, 화장실 간 사이에 갖다 놓은 것이다.
내가 코피를 흘리는 걸 보고 놀란 종업원이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즉각 “코피를 주니까 코피가 나네요.”라고 대답하면서 속으로 ‘으이그, 그저 주둥이만 살아가지고....’라고 중얼거렸다. 마시는 코피나 흘리는 코피나 표기법은 같다.
머리를 깎는 동안 내내 휴지로 오른쪽 코를 막고 앉아 있었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터진 것도 오른쪽 코였다. 코피여 안녕! 너 이제 그만 가고 혹시 다시 오려거든 내년 겨울에나 또 보자꾸나, 이렇게 속으로 인사를 보냈다.
천지에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오고 있는데 코피나 질질 흘리고 살아서야 되겠나? 밤샘 공부하는 수험생들처럼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