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도시 면적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비율은 20%가 넘는다. 그 도로를 따라 수많은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가로수 정비 작업에 나선다. 봄 가뭄에 대비하고 여름 병충해를 예방하는 등 가로수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특히 나무에 세균이나 곰팡이가 번식하는 걸 막기 위해 농약을 비롯한 화학물질이 쓰이고 있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화학물질 없이도 가로수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친환경 기술을 개발했다. 바로 나무에 살고 있는 균을 이용해 나무의 면역력을 높이고 낙엽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도심 녹지 유지 기술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척박한 환경서 자라는 바실러스 균
우리나라 중부 지방 가로수는 벚나무와 은행나무, 이팝나무가 많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하 생명연) 바이오합성연구센터는 이들 가로수 나무들에 공통적으로 서식하는 미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름은 바실러스 아밀로리퀴파시엔스(Bacillus amyloliquefaciens). 된장 같은 발효음식에 많이 들어 있는 미생물과 분류학적으로 같은 속(屬)이다.
가로수에서 이 미생물이 주로 분포하는 부위는 잎이다. 잎 하나 당 1만~10만 마리가 산다. 뿌리나 줄기에서도 발견되지만, 잎에 비하면 수가 훨씬 적다. 나무의 잎은 뿌리나 줄기에 비해 미생물이 살기에 아주 척박한 환경이다. 계속 햇빛을 받는 데다 물기를 머금어둘 수 없어 습기가 매우 적다. 또 자외선과 적외선을 곧바로 받기 때문에 생명활동에 필요한 물질이 쉽게 파괴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많게는 10만 마리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바실러스만의 독특한 능력 덕택이다. 바실러스속은 환경이 나빠지면 길쭉했던 몸을 둥글게 바꾸고,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작동한다. 마치 동물이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자들은 바실러스의 이 상태를 '휴면포자'라고 부른다. 휴면포자 하나의 지름은 1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도 채 안 된다.
곰팡이를 비롯한 균류나 식물의 포자는 보통 새로운 개체를 만들기 위한 생식 수단이다. 그러나 바실러스는 생식 기능과 상관 없이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스스로 몸의 형태를 바꾼다고 과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휴면포자 상태가 된 바실러스는 다른 미생물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에서도 반영구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
가로수 면역력 높여 농약 불필요
생명연 연구팀은 가로수로 쓰이는 벚나무의 잎을 따서 물로 씻어냈다. 이때 떨어져 나온 미생물들을 모아 온도가 80도 정도 되는 뜨거운 물에 넣었더니 대부분의 미생물은 죽고 바실러스 휴면포자만 살아 남았다. 연구팀은 이 방법으로 휴면포자를 대량 분리해 가루와 액체 형태로 만든 다음 대전 유성구의 가로수에 뿌리고 4년 간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가로수의 잎이 두꺼워지고 잘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바실러스 휴면포자를 뿌리지 않은 나무보다 광합성도 더 잘 일어났다. 사람으로 치면 신진대사가 더 활발해졌다는 의미다. 그만큼 병충해도 적었다. 특히 벚나무에선 잎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천공병이 훨씬 줄었다.
류충민 생명연 바이오합성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휴면포자를 가로수 잎에 뿌리면 바실러스가 과거 자신이 살던 환경이라는 걸 인식해 다시 원래 형태로 되돌아간다. 이들이 잎에서 생존하면서 나무가 자라는데 유용한 물질을 만들어내거나 나무 자체의 면역력을 증가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바실러스 휴면포자를 뿌린 은행나무는 다른 은행나무보다 낙엽이 떨어지는데 걸리는 기간이 단축됐다. 류 연구원은 "일반적으로는 낙엽이 적어도 한 달에 걸쳐 서서히 떨어지는데, 휴면포자를 뿌린 경우엔 약 2주 만에 낙엽이 다 떨어졌다"며 "낙엽 지는 기간이 짧을수록 나무가 건강하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가을마다 낙엽 치우는데 골머리를 앓는 지자체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연구팀은 대량으로 분리한 바실러스 휴면포자를 가로수 방제용 미생물 제제로 만들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친환경적으로 가로수를 관리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으로 연구팀은 기대하고 있다. 이달 중순 대덕연구단지 내 가로수에 이 미생물 제제가 살포될 예정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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