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 붙은 파리는 떨어지지도 않아 게다가 걷기까지 하네 할 말이 있어 바닷가에 갔지 맨 처음 우리가 흔들렸던 곳//…// 수족관 벽에 머리를 박아대는 갑오징어들 아프지도 않나봐 유리에 비치는 물결무늬가 자꾸만 갑오징어를 흔들어놓아서//…// 파리처럼 아무 데나 들러붙는 재주도 갑오징어의 탄력도 없으니 백색이 흑색을 잔뜩 먹고 백색이 모자라 밤새우는 날들'
황병승의 시 '둘 중 하나는 제발이라고 말하지'는 더 이상 싸울 대상도, 대결할 사회도 사라진 오늘날 예술가들의 고민을 들려준다. 파리는 갇힌 세계에서 요령껏 산다. 파리를 예술가로 비유하자면 천장에 매달려 걷는 재주를 재능이라 믿을 것이다. 갑오징어는 갇힌 세계의 벽에 줄곧 머리를 박으며 탈출을 시도한다. 화자는, 파리의 마뜩찮은 삶과 갑오징어의 고통스런 삶을 고민하며 밤을 새운다.
대개 사람들이 '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파리의 요령보다는 갑오징어의 몸짓일 터다. 아름답고, 동시에 추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세계의 틈을 내는 것, 그래서 우리의 의식을 뒤집고 새로운 정신을 발견하는 것. 베이컨, 피카소, 고야 등 우리가 위대한 예술가라 일컬은 이들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서경식의 은 유럽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뒤틀린 한국의 근대를, 그럼에도 그 시대를 '예쁘게' 마감한 우리 미술의 한계를 지적한 에세이다. 재일조선인 출신의 저자가 2006년 4월부터 2년간 서울에 머문 후 이런 화두를 던진다.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저자에게 미의식은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그는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ㆍ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기 때문에 무언가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는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지 되물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미술도 인간의 일인 이상 그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돼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근대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한국 근대미술을 그는 '지루하다'고 말하며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프랜시스 베이컨,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거론한다. 이 작가들은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그 현실을 직시해서 그렸고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저자는 한국 근현대 미술이 지루한 이유를 "뒤틀린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목숨 건 대결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 계열의 일부는 예외적이라 했으나, 그것마저 지금은 거의 고사한 형편이다.
'한국 미술에서 근대란 무엇인가, 그 근대를 예술가들은 어떻게 직시하고 담았는가, 시대와 대결한 작가는 누구였나.' 책을 덮은 후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은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미술에서 문학, 음악 등 한국 예술 전반으로 번졌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건 최근 창작집단 '콜트콜텍 이웃집 예술가'가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다. 이들은 2,000여일 넘게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타 생산업체 콜트ㆍ콜텍 노동자들을 위해 지난해 7월부터 노동자들의 손때 묻은 연장을 재료로 작품을 만드는 등 각종 예술활동을 펼쳐왔다.
"정치적 주제를 그렸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천박한 주제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정치적 주제를 다룬 형편없는 작품은 발에 채일 만큼 존재하니까."(9쪽)
'이웃집 예술가'의 작품들이 저자가 지적한 한계를 피해갔는지는 감상자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하지만, 갇힌 세계의 벽에 머리를 박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분명 귀해 보인다. 대결할 대상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는 이제 이런 시도조차 흔하지 않으니까.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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