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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 후손들이 증명 쉽지않아… 국가가 찾아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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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 후손들이 증명 쉽지않아… 국가가 찾아줘야"

입력
2013.02.2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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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여성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은 남성의 그것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3ㆍ1운동 등 항일독립투쟁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옆에 있었지만 역사는 그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온당한 자리를 찾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94주년 3ㆍ1절을 하루 앞둔 28일,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여성 후손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일보가 마련한 좌담에서 이들은 독립운동사의 주변인에 머물고 있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굳이 성별을 따지자는 의도가 아니라, 독립을 위해 총칼에 당당히 맞섰던 여성들의 애국심이 잊혀지기 않기를 바란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김정애 3ㆍ1여성동지회 전 회장은 "당시 여성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결혼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부모들이 먼저 숨겼고, 어떻게라도 빼내서 형을 안 살도록 노력한 것이 사실"이라며 "이러다 보니 독립운동을 했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아 아직까지도 발굴되지 않은 분들이 너무나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그늘에 묻혀 있는 것은 그런 시대상을 감안할 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남성 위주의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감옥에 간 사실이 알려지면 이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았다.

주영숙 여성동지회 전 회장도 "기미년과 지금의 여성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그때는 착한 아내, 어진 어머니가 최고의 가치였다"며 "그런 시대에 살았던 여성들이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더욱 의미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예우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말했다. 2008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애국지사 채애요라 선생의 손자며느리 박옥란씨는 "여성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던 시대라 독립운동을 한 뒤에는 숨어서 지내야 한 게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처지였다"고 말했다.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여성독립운동가가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고, 이 때문에 국가유공자 지정에 필수적인 증거가 될 만한 법원 판결이나 경찰 조서를 찾는 것도 힘들다. 더구나 독립운동을 한 곳이 북한 지역이라면 증명이 안돼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화옥 여성동지회 회장의 시어머니가 바로 이런 경우다. 이 회장은 "함흥 영생여학교 선생님이었던 시어머님은 캐나다 선교사인 학교장이 방에 가뒀는데도 이틀 밤을 새며 그린 태극기를 들고 학생들과 함께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셨다"며 "함흥학생운동 당시 붙잡힌 42명 중 여성은 딱 2명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의 시어머니는 이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9개월 옥고를 치렀다. 반면 시아버지 등 남성들은 서울로 압송된 뒤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시아버지는 옥고를 치른 사실이 우리 정부의 기록에 남아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게 됐지만, 수감 기록이 없는 시어머니는 훈격이 낮은 대통령표창을 받았을 뿐이다. 후손들은 시어머니의 경찰 조서라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이 회장은 "그나마 시아버님이 유공자이시고 자서전을 한글과 영어로 출판해서 표창이라도 받은 것"이라며 "국가보훈처에 문의하면 '북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기록이 없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화학당 출신인 채애요라 애국지사처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 중 다수가 선교사학교에 다닌 사실도 이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잡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느니 차라리 영어 이름을 썼기 때문이다. 영어 이름으로 조서를 꾸미고 판결이 이뤄진 경우 현 시점에서 자료를 찾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박옥란씨는 "집에서는 시할머니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애기를 하고 단편집 등에도 성함이 나오지만 국가보훈처에는 채혜수라는 본명으로 등록이 안 돼 있었다"며 "어딘가에 분명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기록이란 기록은 다 찾다 결국 국가기록원의 평양 여감옥 관련 문건에서 채애요라라는 친필 서명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2년 6월 형을 언도받고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이 한 줄의 기록이 없었다면 채애요라 애국지사가 2008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기는 불가능했다.

이들은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조명에 소극적인 정부에 한 목소리로 서운한 감정을 쏟아냈다.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을 규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후손들의 몫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박옥란씨는 "가족들에게만 맡기기보다 국가 차원에서 시대적 이유 때문에 아직도 묻혀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더 많이 찾아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며느리는 소외되고 아들과 손자 위주로 이어지는 유공자 혜택에는 문제가 많다"고 주장했다. 주 회장은 "여성에게 혹독한 시기였기에 그 당시 여성이 보여준 용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눈물겨운 그분들의 함성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발굴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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